이윤택 연극연출가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연극계 미투 운동으로 밝혀진 자신의 성폭행과 성추행 등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국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은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영화사에서 일한 경력 없이 영화판에 뛰어들어 명예와 부를 얻었다. 1979년 동생 밥과 함께 세운 미라맥스는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초반까지 할리우드의 ‘무서운 아이’였다. 와인스틴은 89년 120만달러를 들여 만든 저예산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를 도약대 삼았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이 영화로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역대 최연소(26세)로 수상했다. 와인스틴의 국제적 이름값은 급상승했다. 돈벼락도 맞았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는 제작비의 35배가 넘는 흥행 수익을 남겼다.

와인스틴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월트디즈니는 93년 미라맥스를 6,000만달러에 인수했다. 돈 되는 예술영화를 발굴해 시장에 소개하는 와인스틴의 사업 수완에서 미래를 보아서다. 와인스틴은 미라맥스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유지하며 예술성 강하고 상업성까지 갖춘 영화들을 선보였다. 할리우드 메이저스튜디오들은 와인스틴의 성공기를 벤치마킹해 작은 영화를 전담하는 회사 파라마운트 빈티지, 폭스서치라이트 등을 만들었다. 할리우드 게임의 룰을 바꾼 셈이다. 형제는 2005년 미라맥스를 떠나 와인스틴컴퍼니를 따로 차렸다. 와인스틴컴퍼니를 따라다니는 수식은 미니메이저. 워너브러더스나 유니버설처럼 큰 회사는 아니지만 업계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겼다.

와인스틴은 악명도 높았다. 시장성을 내세워 가위질을 서슴지 않아 유명 감독들과 종종 불화했다. 뒤끝도 만만치 않았다. 와인스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영화들은 개봉 연기라는 불이익을 당했다. 시기가 적절치 않다거나 후반작업이 필요하다는 등 갖은 핑계가 따랐다. 메이저스튜디오가 아니니 내부 견제 장치는 딱히 없었다. 작지만 큰 회사라는 이중성은 와인스틴의 전횡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미국에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을 초래한 와인스틴의 성폭력 행각은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국가와 분야는 다르지만 국내 연극계 두 거두 오태석・이윤택 연극연출가의 지난 삶은 와인스틴의 성공과 몰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70년대 서울연극학교에서 사제의 인연을 맺은 오태석・이윤택 연출가는 바통을 주고 받으며 연극계를 이끌어왔다.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닮은 꼴이었다. 연극 관련 학력은 일천하지만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국내 무대 주류가 됐다. 두 사람이 각기 설립하고 이끌어온 극단 목화레퍼터리컴퍼니(목화)와 연희단거리패는 오래도록 한국 연극의 쌍두마차 역할을 했다. 많은 스태프와 유명 배우가 두 극단에서 성장했다. 연극에 우리의 것을 적극 품은 두 사람의 공연 현장엔 긴장감이 서려 있곤 했다. 연습실에서 만난 스태프들도 바짝 ‘군기’ 든 모습이었다. 좁게는 극단 내부, 넓게는 연극계에서 두 사람은 권위적인 지배자 같았다. 연극계가 상업적으로 비주류에 해당한다지만 실력자가 누릴 수 있는 권력은 작지 않다. 두 사람은 연극계에 쌓은 명성을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성을 만들고 성폭력을 행사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두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무대에 쌓아 올린 업적은 이제 더 이상 환호와 갈채의 대상이 아니다. ‘오구: 죽음의 형식’(이윤택)과 ‘태(胎)’(오태석)는 문학교과서에서도 퇴출될 예정이다. 연극계 큰 어른에서 조소와 비판의 대상으로 몰락한 두 사람은 여전히 불명예의 길을 걷고 있다. 오 연출가는 성폭력 폭로에 대해 해명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이 연출가는 연출된 것이라는 내부 고발이 있었던 공개 사과 기자회견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다. 입이 벌어지는 추가 폭로에 대해서도 귀를 닫은 모양새다. 한때 거장으로 불린 이들답지 않게 졸렬하다. 피해자들을 향한 진정 어린 사과를 해야 불명예 퇴진을 그나마 명예롭게 할 수 있다. 해명과 사과는 자신들에게 박수를 보낸 관객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공공기관을 향한 예의이기도 하다.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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