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검색창에 검색어를 입력하다 보면 철자 하나가 찍힐 때마다 그 철자로 시작되는 단어가 화면에 쭉 뜬다. ‘자동완성 기능’이라 불리는, 검색자의 수고를 덜기 위해 고안된 기술이라고 한다.

가령 검색창에 ‘ㅎ’을 치면 ‘황금빛 내 인생’이란, 근자에 40%대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보이는 주말 TV드라마 제목이 가장 위에 뜬다. 다음으로 ‘ㅏ’를 쳐서 ‘하’가 완성되면 ‘하나’나 ‘한국’ 등으로 시작되는 고유명사들이 나열된다. 그렇게 ‘핱’을 거쳐 ‘하태’까지 치면 북한응원단의 응원 도구인 가면 주인공이 김일성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한때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의 수장이었던 이를 널리 ‘선전’(?)한 바른미래당 국회의원 이름이 자동완성 되어 뜬다. 이념 갈등을 정치적 밑천으로 삼아온 ‘가면 하태경’ 의원 말이다.

자동완성 되는 말은 검색하려는 말과 자주 연동되어 사용된 말이다. 가면 응원 논란 당시 검색창에 가면을 넣으면 하태경이란 이름이 바로 떴던 이유다. 달리 표현하자면 ‘가면’과 ‘하태경’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말이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평창 동계올림픽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말은 무엇일까. 그것이 ‘평양’이길 바라는 단세포적 준동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통일’이 가장 먼저 뜨는 말이 아닐까 싶다. 북한의 고집스런 핵 개발, 미국의 ‘코피전략’ 등 한반도서의 전쟁 위기가 어느 때보다도 고조된 상태에서 이뤄진 남북 선수단 공동입장, 남북 단일팀 구성, ‘백두혈통’의 최초 방남 등이 국내외적으로 크게 화제가 됐기에 그렇다.

물론 단일팀 구성을 둘러싸고 적잖은 논란도 일었다. 그것이 대통령 지지율 하락의 주요인이 됐고, 통일을 둘러싼 ‘2030 세대’와 ‘586 세대’ 간의 갈등이 조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이마저도 통일을 우리 일상으로 소환하는 데 일조했다. 이는 통일이 ‘나’의 삶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음을 입증해 준다. 이른바 ‘남남갈등’이 증폭될 여지는 여전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통일을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가 ‘나’의 일상과 직결되어 있음이, 우리가 저마다 통일에 대한 자기 관점을 갖출 필요가 있음이 부각되었다.

3,000여 년 전쯤 중국에서 역성혁명이 일어났다. 훗날 주 무왕으로 불리게 된 희발이란 제후가 상나라 주왕을 쫓아내고 자기가 천자로 등극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공자는 무왕을 요임금이나 순임금 급의 성군 반열에 올려놓았다. 맹자도 폭군은 실질적으로는 임금으로 볼 수 없다면서, 무왕의 역성혁명은 신하가 임금을 폐한 하극상이 아니라 성군이 폭정을 일삼는 일개 필부를 내쫓은 의로운 거사였다고 단정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폭군일지라도 형식적으로는 어찌됐든 임금이었다. 게다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신하는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존재여야 했다. 결국 공자와 맹자는 무왕을 옹호할 수 있는 근거와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동시에 제공한 셈이다. 그러니 역대로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주로 백이와 숙제 형제에 대한 평가의 형식으로 표출됐다. 그들이 전쟁이란 폭력에 의지하여 폭정을 종식시킨 무왕을 비판하며 곡기를 끊은 채 수양산에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이 형제를 의롭다고 칭하면 무왕이 의롭지 못하게 되고, 무왕을 의롭다고 하면 백이 형제는 고지식한 지식인의 전형으로 치부되었다. 한쪽이 옳으면 다른 쪽은 무조건 그르게 되는 형국이었다. 공자 이래 맹자, 사마천을 거쳐 당대의 한유, 송대의 왕안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 지성들이 백이론을 펼쳐냈지만 논란이 마무리되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연암 박지원이 이들 논의를 갈무리할 수 있는 탁월한 관점을 제시했다. 무왕과 백이 형제 등 관련 인물을 “서로 연관하여(相須)” 보면 그들 모두가 성인이고, 따로 떨어뜨려 보면 그들 모두 성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무왕은 전쟁이란 거대 폭력에 의지했다는 하자가 있고, 백이 형제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도외시한 하자를 범했기에 성인으로 보기 힘들지만, 서로 연관하여 보면 그들은 폭정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했다는 현실적 이로움과 폭력으로 폭정을 제거하는 방식이 의롭지 못함을 역사에 드리움으로써 후인을 경계했다는 윤리적 소임을 동시에 실현해낸 성인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서로 연관하여 보아야만’ 비로소 그들이 역할분담과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취한 성인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얘기다.

통일을 관련된 것들을 최대치로 연관하여 봐야 하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통일이라고 쓰되 ‘통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통일을 ‘평양’이나 ‘남남갈등’, ‘전쟁’ 등과 연관 짓는 삿된 욕망을 제압하며 준비과정부터 방식, 결과 모두를 ‘평화’와 긴밀하게 결합시켜 갈 수 있게 된다. 이념 간, 지역 간, 세대 간 갈등이 수구 정치인과 언론, 세습 재벌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왔기에 더욱 더 그러하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