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카와 슌타로 '구덩이'

구덩이
다니카와 순타로 지음∙와다 마코토 그림∙김숙 옮김
북뱅크 발행∙32쪽∙1만2,000원

단순하고 간결한 텍스트는 여백이 많은 숲 속, 한적한 산책길과도 같다. 독자는 천천히 걷다 멈춰서다, 사유하며 그 길을 거닌다. 이 텍스트가 그러하다. ‘구덩이’, 이 간결한 그림책이 전하는 것은 그저 한 아이가 구덩이를 팠다가 다시 메우는 단순한 이야기다. 한 장면 한 장면, 이야기를 따라가며 생각에 잠겨 본다.

북뱅크 제공

#1. 일요일 아침, 아이는 아무 할 일이 없어서 구덩이를 파기로 한다. : ‘그래. 할 일이 없으면 뭐라도 하게 되지. 그런데 어른들은 왜 자꾸만 뭔가를 하라고 하는 걸까?’ #2. 엄마가 와서 묻는다. “뭐 해?” 아이는 “구덩이 파.” 그러고 나서 계속 구덩이를 판다. : ‘엄마는 보고도 몰라서 물은 걸까, 무얼 확인하고 싶어서 물은 걸까? 염려 마시라. 아이는 제가 무얼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3. 동생이 와서 말한다. “나도 파고 싶은데.” 아이가 대답한다. “안 돼.” : ‘맞다. 혼자서만 하고 싶고, 해야 하는 일도 있다. 굳이 그것까지 누군가와 함께 할 필요는 없다.’ #4. 친구도 와서 묻는다. “뭐 할 거야? 이 구덩이.” “글쎄.” 아이는 계속 구덩이를 판다. : ‘꼭 목적이 있어서 무얼 하는 건 아니다. 때론 ‘그냥’ 하는 일도 있고 그럴 때 ‘나’는 순전해진다.’ #5. 아빠도 와서 말한다. “서둘지 마라. 서둘면 안 된다.” 아이는 대답 대신 “흠.” 그러고 나서 계속 구덩이를 판다. : ‘스스로 무얼 하는 사람은 누가 어쩌라 해서 그러거나 않거나 하지 않는 법이다.’ #6. 아이의 손에 물집이 잡힌다. 귀 뒤에 땀이 흐른다. 아이는 생각한다. ‘더 파야 해. 더 깊게.’ : ‘몰입한 뒤에야 자신을 만나는 거구나. 자신을 느끼고, 넘어서고 싶어지는 것이로구나.’ #7. 그때, 구덩이 아래에서 애벌레가 기어 나온다. “안녕.” 아이가 말하자 애벌레는 잠자코 흙 속으로 되돌아가고, 아이는 갑자기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그제야 아이는 파는 일을 그만 두고 쪼그려 앉는다. : ‘왜 멈춘 걸까? … 분명한 것은 물집이 잡히고 땀이 흐르도록 힘들여 파들어 간 깊은 곳에서 무심한 애벌레를 만났다는 것,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었으나 애벌레는 잠자코 제자리로 돌아갔다는 것.’

#8~#12. 이제 조용한 구덩이 안에서 아이는 흙냄새를 맡고 삽 자국을 만져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건 내 구덩이야.’ 다시 엄마와 동생과 친구와 아빠가 차례로 와서 예의 참견을 하지만 아이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그것은 혼자 하는 일이요,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도 누구의 평가 대상도 아닌 오롯한 그 자체임 또한 잘 알고 있는 이 아이를 통해 작가는 무슨 뜻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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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6. 아이는 위를 본다. 구덩이 안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여느 때보다 훨씬 파랗고 높아 보인다. 그 하늘을 나비 하나 가로질러 날아간다. 아이는 일어나 구덩이에서 올라온다. 그리고 구덩이를 들여다본다, 깊고 어두운 구덩이. ‘이건 내 구덩이야.’ 아이는 한 번 더 그렇게 생각하고 구덩이를 메운다. 아이가 떠난 자리, 어느덧 하루가 가서 하늘은 어둑한데 땅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탄해져 있다. : ‘어찌 아무 일 없었으랴. 아이는 참견을 물리치고 물집이 잡히고 땀을 흘렸으며 애벌레를 만났다. 흙냄새를 맡고 삽 자국을 만지고 파랗고 높은 하늘을 보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나비를 보았다. 그리고 거듭 생각했다. 이건 내 구덩이야.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 아이의 하루는.’

생각하며 거닐던 숲을 나오자, 문득 세례처럼 느낌이 몰려온다. 어떤 간절함, ‘아무 할 일 없어 구덩이를 파 본 적이 언제였던가. 나도 그 속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은데….’ 그러나 위로 받은 느낌, ‘그래. 그저 구덩이를 파고 메우는 듯하여 네 삶이 때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만 같지?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단다.’ 숲 속 공기 같은 여백의 세례다.

김장성 그림책 작가∙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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