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獨 하노버 국립음대 괴츠케 교수
5년 전 日 콩쿠르서 인연 맺은뒤
연주에서 미세한 뉘앙스 표현 등
작곡가 의도 생각하는 법 알려줘
"또래 동료 음악가도 나의 스승
80대까지 열정 유지하고 싶어"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지난해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샴페인이 찍힌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지금 같이 마실 수 없으니, 나 혼자라도 축배를 들고 있다”는 메시지도 함께 왔다. 내게 축하를 전하기 위해 혼자서라도 샴페인을 마셨다는 분은 2016년 10월부터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내가 사사하고 있는 베른트 괴츠케(67) 선생님이다. 콩쿠르 예선 때부터 인터넷 생중계로 내 연주를 챙겨보며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셨던 분이다. 반 클라이번 우승도, 이 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로부터 음악을 대하는 진중한 태도를 배웠다. 음악의 전체적인 흐름을 읽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움을 주셨다. 선생님과 함께 한 시간은 1년 밖에 되지 않지만, 내 연주에 큰 의미를 지닌 분이다.

인간적 매력에 빠지다

사실 선생님과 스승과 제자로 만나기로 한 건 모험이었다. 그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스터클래스에서 레슨을 받은 적도 없었고, 선생님의 연주를 들을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11년 간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 독일로 건너가기로 마음 먹었을 때, 선생님이 떠오른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인간적으로 깊은 감명을 받은 순간이 있었다. 2013년 일본 센다이 국제 콩쿠르 때였다.

보통 콩쿠르가 끝나고 나면 심사위원들은 우승자의 연주에 대한 심사평을 전해준다. 몇 줄 정도 간단한 평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괴츠케 선생님의 글은 종이에 빼곡히 담겨 있었다. 앞으로 더 깊이 있는 나의 색깔을 갖는 게 중요하다며 구체적으로 해준 조언이 마음에 남았다. 그렇게 긴 평을 남겨주는 게 어렵다는 걸 알기에 더욱 그랬다. 다행히 오디션에서도 합격해 나는 하노버에서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때 선생님이 해준 말씀 중 “연주자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다. 연주자는 모든 사람을 언제든 기쁘게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당신은 분명히 개성적인 표현과 스타일의 책임감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것이다”라는 문장이 계속 마음이 박혔다. 물론 첫 레슨에서 선생님과 맞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다. 결과적으로 음악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내게 맞는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으로부터 소리에 대한 조언을 받았다. 힘이 있고 큰 소리는 연주하기가 수월하다. 작고 세밀한 소리를 제대로 표현하는 게 오히려 더 어렵다. 손가락 근육 중에서도 약한 부분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세세하게 살필 수 있게 됐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표현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도움을 주셨다.

괴츠케 선생님은 독일 출신이다. 선생님을 사사하며 독일 작곡가들의 고전 레퍼토리 구조를 파악하고 더 체계적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됐다. 이 점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콩쿠르 준결선에서 연주했던 베토벤의 소나타 30번은 굉장히 심플하지만 그 안에 작곡가의 모든 의도가 깃들어 있는 곡이다. 선생님은 베토벤의 의도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노래하듯이 시범 연주를 보이셨다. 그의 연주를 듣고 정말 존경스러웠다는 말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한 음 한 음 소리를 마스터했다는 느낌이 들 만큼 말 그대로 빼어난 연주였다. 본 받고 싶었다.

레슨 때 시범 연주를 들을 때면 왜 연주회를 자주 안 여시는지 궁금하다. 후학 양성에 더 큰 의미를 두고 계신 것이라 추측해 볼 뿐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헌신적이다. 연로한 나이에도, 체력적으로 피곤할 수도 있는데도, 레슨 시간만큼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연주회 레퍼토리를 고민할 때도 나보다 더 신경을 써주셨다. 학교가 있는 하노버가 아닌 뮌헨에서 거주하기로 했을 때, 비자 발급에 필요한 편지를 써준 것도 선생님이었다. 학교에서 평생 공부하지는 않겠지만 선생님과는 평생 연락을 하고 싶다.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나 역시 음악으로 치유 받는 느낌이 든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은(오른쪽에서 네 번째) 현재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사사하고 있는 베른트 괴츠케로부터 음악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괴츠케와 그의 제자들이 식사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왼편에 얼굴이 보이는 사람이 괴츠케. 선우예권 제공
평생 음악에 헌신하는 삶 꿈꿔

독일에 가 있는 시간에는 꼭 선생님을 뵈러 가려고 한다. 뮌헨에서 하노버까지는 열차로 5시간이 걸린다. 열차를 타고 하노버로 향하는 시간들도 즐겁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타고 다니는 열차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 동안 이런 저런 고민을 하기도 하고, 잡생각도 많이 한다. 열차 안에서는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대중음악도 듣는다. 이문세의 ‘사랑 그렇게 보내네’ 이소라의 ‘믿음’ 같이 애잔한 감동이 남는 곡을 좋아한다. 담담한 목소리 뒤에 특유의 고독과 슬픔이 느껴지는 것도 좋다. 클래식 음악에서는 슈베르트를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꼽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내 연주는 많은 곳에서 영향을 받았다. 내가 느끼는 여러 감정들과 생각이 연주로 표현된다. 하지만 내 개성을 자유분방하게 드러내기보다 작곡가의 의도 안에서 그 감정이 표현되는 연주를 하고 싶다. 괴츠케 선생님을 통해 그런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배웠던 모든 분들이 음악에 헌신적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음악 그 자체를 좋아한 결과다. 미국 커티스 음악원에서 6년간 배웠던 세이무어 립킨 선생님은 재작년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공원을 산책하고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를 하셨다. 필라델피아와 뉴욕을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자신의 연주에도 끊임없이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하셨다. 매네스 음대에서 사사한 리처드 구드 선생님에게도 레슨을 받고 나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구드 선생님은 악보로 둘러싸인 서재에서 레슨을 했다. 내가 연주하는 곡이 악보의 편집자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교해 보라 하셨고, 곡과 관련된 책을 빌려주기도 하셨다. 모두 본받을 부분들이다.

연주자는 평생 동안 끊임없이 배우는 직업이다. 선생님에게도 배우지만 동료 음악가에게도 배운다. 내 또래가 됐든 나이가 많은 스승님이 됐든, 나는 평생 동안 누군가에게 배울 것이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음악을 통해 느끼는 행복감이 없다면 연주자 생활을 이어가기 어렵다. 음악이 주는 안정감 하나로 버티는 것이다. 70, 80대가 되어도 이 열정을 계속 지니고 있는 연주자의 삶을 살고 싶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말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 했습니다.>

정리=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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