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나라 사이에서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외교’를 한다. 상대를 판단하고, 이해득실을 따지고, 상대에게 가장 큰 이익을 얻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한다. 서로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질 경우 밀월이 유지되지만 협상이 결렬되면 한 순간 남이 되거나 심지어 적이 되기도 한다.

공적 관계에서야 그렇다 쳐도 사적 관계에서까지 이기적 유전자로 살아가는 이들을 만날 때면 피곤하고 또 안쓰럽다. 남들이 그 마음을 모를까. 사나운 언니가 되면 사나운 동생을 만나야 하듯 타인은 내 마음의 진동에 따라 반응한다. 내가 불안하고 불편해서 다정하고 부드럽지 못할 때 그 역시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할 때 남이 나를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마음은 결국 그 마음만 만나고 그 마음만 이끌어낸다. 상대가 그러해서, 사랑이 그러해서가 아니라 제가 불러일으킨 제 마음이 삶으로 굳어져간다.

문학 역시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의 일이라는 걸 동시집 <둘이라서 좋아>는 스스로 증명한다. 혼밥, 혼술, 혼놀 시대에 둘이라서 좋다니, 제목만 보자면 뒤처지고 의존적인 감각 아닌가, 뭐 동시가 그렇지, 라고 생각한다면 선입견으로 마음 하나를 잃는 거다.

“엄마 아빠 돌아가신 날//고아라고 손가락질 받던 날//동생이 바지에 오줌을 싸고 집으로 온 날//언 손으로 쌀을 씻어 밥을 안치던 날//깜깜한 밤에 동생과 단둘이 있던 날//차디찬 방바닥에서 잠을 자던 날//나는 울지 않았다//나는 언니였다”(‘나는 울지 않았다’ 전문)

‘둘이라서 좋아’에는 열두 살, 일곱 살에 부모를 먼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자매의 이야기와 마음이 있다. 열두 살 꼬마는 시인이, 일곱 살 꼬마는 동화작가가 되어 옛날의 슬픔이 오늘날의 기쁨과 희망이 되는 찬란한 시간을, 오늘의 위로가 필요한 어린이 옆에서 속삭인다.

하나의 이야기임에도 시집 한 권, 시 한 편마다의 긴장감이 흐트러지지 않는 문학적 완성도나 가장 밑바닥의 슬픔에서 희망을 끌어올리는 문학 정신 같은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잣대쯤은 이 시집이 증거하는 문학, 그 자체 앞에서 무색할 뿐이다. 언니를 언니이게 했던 동생이 언니의 시집 마지막에 부친 ‘시 편지’가 이 시집을 한 번 더 오롯한 문학으로 만든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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