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1987 무게 벗고 톡톡 튀는 학과 별명

1980년대부터 학교ㆍ과별로 태어나
민주화 이후 자연스레 잊혀져
다양한 가치ㆍ소속감 반영 재등장
[쾌걸조소] ‘해방이화’여대 조소과 학생회의 홍보 포스터. 만화 ‘쾌걸 근육맨’을 패러디 한 우스꽝스런 이미지와 함께 ‘쾌걸조소과’라는 새로운 과 별칭에 학생들이 크게 호응했다. 전통적인 FM인 ‘강철조소’를 내세웠다면 이만한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까?
[빅뱅물리] ‘청년서강’대학교 물리학과의 별칭은 ‘빅뱅물리’다. 2015년 학부제에서 학과제로 변경되면서 투표를 통해 정했는데 ‘빅뱅이론’이 연상된다.
[정복몽골어]2009년 개설된 ‘애국외대(한국외국어대)’ 몽골어학과의 깃발. 당시 학생들은 몽골이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한 것처럼 학과와 구성원 모두 크게 성장해 나가자는 의미에서 과 FM을 ‘정복몽골어’로 정했다.
[백야영상] ‘민족성대(성균관대)’ 영상학과는 2016년 원래의 FM ‘간지영상’ 대신 ‘백야영상’을 새로운 FM으로 교체했다. 밤샘 편집 실습이 많은 과의 특성을 반영했다.
[민주화 투쟁 시대 만들어진 FM] 1987년 6월 서울 연세대학교 앞에서 학생들이 각 단과대와 학과, 동아리 FM이 적힌 깃발을 앞세우고 폭력경찰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선봉국문] ‘민족성대’ 국문과 깃발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FM이 쓰여 있다.

‘통일연세’ ‘선봉국문’과 같은 FM(Field Manualㆍ대학생들이 자기 소개 시 학교나 학과 명 앞에 붙이는 별칭)의 시초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각 대학 총학생회는 투쟁 의지를 다지면서 타 대학과의 차별화를 모색하기 위해 민족, 민주, 구국, 자주, 해방 등의 구호를 학교 이름 앞에 붙이기 시작했다. 단과대 및 학과 별로도 FM을 만들어 외치며 소속감과 결속을 다졌고 그 후 학교의 전통이 됐다. 그러나 학생 운동이 점차 시들해지면서 투쟁 의지는 물론 FM 자체의 의미마저 서서히 퇴색해 가고 있다. ‘1987’ 시대 학생들이 지향한 최고의 가치는 민주화였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학생들의 관심사는 확연히 다르다. 그들의 다양한 가치와 현실이 반영된 새로운 학과 이름표에 관한 이야기다.

#쾌걸조소

지난해 말 선출된 ‘해방이화’여대 조소과 집행부는 만화 ‘쾌걸 근육맨’을 패러디한 홍보 포스터를 제작해 학생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근육질 캐릭터에 집행부 얼굴을 합성한 우스꽝스러운 이미지와 함께 학생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쾌걸조소과’라는 새로운 과 별칭이었다. 학생회장 이찬경(22)씨는 “단톡방에 올리자마자 ‘ㅋㅋㅋㅋㅋㅋㅋ‘가 쏟아졌다. 우리 과가 비교적 힘을 많이 쓰는 편인데 강하면서도 유쾌한 느낌을 주는 ‘쾌걸’이란 단어 덕분에 공감을 이끈 것 같다”고 말했다. 조소과엔 ‘강철조소’라는 FM이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다.

#시키디마

단호한 거절을 떠올리게 하는 ‘시키디마’는 지난해 초 탄생한 ‘단결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의 새 별칭이다. ‘중심시각’이라는 원래의 FM이 있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그 의미와 유래를 알지 못한다. 반면 ‘시키디마’를 통해 선후배 사이의 위계질서를 타파하자는 뜻을 공유한다. 전 학생회장 심모(24)씨는 “선배가 시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관성적 구조를 벗어나 보자는 다짐 위에 유머코드를 입혔다”며 “디자인 전공자들이 사회에서 겪는 부당한 갑질을 향한 일갈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신입생 예비대학 행사장엔 ‘시키디마’를 비롯해 ‘심쿵산디’ ‘세젤예술’ 등 미대 내 11개 전공과의 새 별칭들이 전통 FM과 함께 현수막 형태로 걸렸다.

[새로운 학과 별칭]지난해 초 열린 ‘단결홍익’대학교 ‘민족미대’의 신입생 예비대학 행사장에 11개 전공 과의 새로운 별칭이 걸려 있다.
[전통적인 학과 FM] 새로운 학과 별칭 옆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FM도 함께 걸려 있다.

투쟁 구호가 잦아든 대학가에 새로운 가치와 현실을 반영한 학과 별칭이 등장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를 학과 이름과 결합해 또 다른 신조어를 만들거나 과의 특성을 재치 있게 해석한 이름표로 바꿔 달기도 한다. ‘민족성대(성균관대)’ 영상학과 강지은(23)씨는 “편집 실습 때문에 밤샘이 잦은 우리 과 특성을 살려 2016년 ‘간지영상’에서 ‘백야영상’으로 FM을 바꿨다. 공모를 통해 정한 덕분에 ‘모두 함께 만들어 간다’는 의미를 살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톡톡 튀는 학과 별칭의 등장은 다수의 학생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학생회의 현실과도 연관이 있다. 취업난 속에서 갈수록 개인주의화 하는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집행부로선 눈길을 끌면서 공감이 가능한 캐치프레이즈의 개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진규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자신의 학교나 학과 이름에 최고의 가치를 덧붙이고 싶은 욕망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다만, 개인의 생존이 가장 큰 가치인 지금의 학생들에겐 과거의 정치적 투쟁 구호 보다는 경쟁력 돋보이는 참신한 표현이 절실해 보인다”고 진단했다.

[민주동덕] ‘민주동덕’여대와 ‘해방이화’여대 학생들은 최근 학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잊혀져 가던 학교 FM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사진은 총학생회 깃발(왼쪽)과 ‘민주동덕’을 소재로 만든 스티커.
[해방이화] ‘해방이화’여대 총학생회 깃발(왼쪽)과 ‘해방이화’ 손부채.
#다시 일상으로 나온 ‘해방이화’ ‘민주동덕’

학생들이 학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잊혀져 가던 학교 FM의 의미를 새롭게 되찾은 경우도 있다. 2016년과 2017년 ‘해방이화’여대에서 벌어진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거부 운동과 총장 퇴진 운동 당시 학생들은 손에 손을 잡고 ‘해방이화’를 외쳤다. 촛불집회가 그랬듯 함께 행동하고 성과를 이끌어 내는 집단적 경험의 과정에서 ‘해방이화’ 구호의 역할은 컸다. 재학생 한서희(23)씨는 “대학생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어떤 비난이나 부당함에도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이화대학생을 상징하는 것 같아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러한 자부심은 ‘해방이화’가 적힌 손부채와 포토카드 등 각종 소품 제작으로도 이어졌다.

‘민주동덕’여자대학교 총학생회 역시 지난해 12월 ‘민주동덕’ 이라고 쓰인 스티커와 배지를 제작해 배포했다. 학생들이 학교 측의 학과 통폐합 시도에 맞서 철회를 이끌어 낸 해인 만큼 ‘민주동덕’에 담긴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보다 친숙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총학생회장 박종화(25)씨는 “예쁘고 소장가치 있는 물건을 통해 학생들이 학교에 대한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미소 인턴기자

[애국한양] 1987년 6월 민주화 투쟁에 나선 ‘애국한양’대학교 학생들이 학교 FM을 적은 흰 천을 앞세우고 거리 행진을 벌이고 있다.
[민중시대] ‘민중서울시립대학교’ 총학생회 깃발.
[단결홍익] ‘단결홍익’대학교 총학생회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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