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관료 박중양의 반민특위 공판이 1949년 1월 12일 열렸다.

대한제국의 친일파 관료 박중양(1872~1959)에 대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공판이 1949년 1월 12일 열렸다. 그는 여느 피고와 달리 자신의 행적을 변명하지 않았고, 시종 당당하게 소신을 피력했다. 그는 “국민의 신변과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는 그러한 정부에 왜 충성해야 하느냐?”고 따졌고, 친일 개화파로 손가락질 당하던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등 갑신정변의 개화파들을 애국자로 옹호했다. 심지어 이완용도 자신도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으로서 “역사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철저한 황국 신민이었고, 여러 지방 도지사와 중추원부의장을 역임한 관료였고, 백작 작위의 귀족원 의원이었다. 그는 명백한 친일파였다. 하지만, 여러 행적으로 드러난 바 그의 친일이 ‘반민족행위’라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조선 근대화와 조선인의 계몽ㆍ개화를 위한 방편으로 친일을 선택했고, 선택의 바탕에는 대한제국 황실과 중앙ㆍ지방 관료 집단의 부패와 무능, 조선인의 몽매와 아집에 대한 낙담이 있었다. 그로선 왕조의 권위를 떠받드는 것이 무의미했고, 역량 없는 민족의 독립 함성도 공허했다.

빈한한 아전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도 못 받다가 1897년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을 떠난 건, 그로선 개벽의 기회였다. 그는 은행원 양성교육기관인 도쿄부기학교를 졸업했고, 재학 중 도쿄경시청의 경찰제도 연구생으로서 경찰 업무와 감옥제도를 익히는 등 근대 문물과 정치ㆍ행정 제도를 탐구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사설 교육기관에서도 공부했는데, 조선인인 그를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하던 이토의 인품에 감복해 평생 존경했다.

그는 1903년 귀국했고, 2년 뒤 이토의 조선총독 부임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진주판관 대구군수, 황해ㆍ충북도지사 등을 역임하며 도로 건설과 의료 혁신ㆍ의학교 개설, 조선인 참정권 옹호 등 꽤 근사한 개혁정책을 폈다. 일경 등 공권력의 조선인 차별을 시정하고 개선하는 데도 힘써 떠세 부리는 일본인 순사를 백주대낮에 매질하거나 옷을 벗겨 수모를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3ㆍ1운동 진압에도 열성이었지만 어린 학생들의 석방에도 앞장섰다. 물론 그는 일제 관료로서 징용ㆍ징병 독려 등 무참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친일이 대한제국 왕실에 충성하는 것보다 백성에게 나은 길이라 여겼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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