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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몰랐다, 내 안에 꿈틀대는 분노를!

입력
2018.01.09 04:4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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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보ㆍ국립정신건강센터 ‘일반인 임상분석’

스트레스 정상범위 13 이하인데

참가자 5명 평균은 18.6… 최고 23까지

#2

상위권 학생, 고교 진학 앞 공부 안 돼 불안

만년 차장, 술로 화 풀다 술 때문에 문제

워킹맘, 직장 스트레스 집에서 화풀이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직장에서는 항상 ‘을’의 자세로 환한 표정으로 일을 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제가 순한 성격인줄 알지만 아이들에게는 ‘왕짜증 엄마’로 통해요. 고단한 몸을 이끌고 퇴근했는데 집안일마저 쌓여 있으면 직장에서 쌓였던 화가 견딜 수 없이 치밀거든요. 화풀이의 1차 타깃은 늘 남편이고요.”(44세 워킹맘 B씨)

“스트레스가 많아도 ‘내가 성격이 예민해서 그런가 보다’하면서 일부러 생각을 안 하려고 하고 회피하는 편이에요. 겉으로는 표를 내지 않으려고 하니 주변에서는 제가 그렇게 불안 증상이 심한지 잘 모르는 편이고요.”(16세 A양)

한결같았다. 한국일보가 보건복지부 산하 국립정신건강센터에 일반인 5명의 대면 진료와 심리 검사를 의뢰한 결과 이들 5명 전부 스트레스 척도가 정상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2명은 범위를 한참 벗어난 심각한 수준이었다. 높은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 분노지수는 그래도 정상 수준이었지만 이를 구성하는 언어적 공격성, 분노감, 적대감 등의 요소들은 대부분 1, 2개씩 정상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한국일보의 의뢰로 일반인 5명의 분노 지수를 측정한 의료진이 지난달 26일 서울 중곡동 국립정신건강센터에 좌담회를 열고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빈 정신응급진료실장, 조근호 정신건강사업과장, 임선진 노인정신과 전문의, 이원혜 심리건강과장, 최정원 소아청소년정신과장. 사진=류효진 기자
한국일보의 의뢰로 일반인 5명의 분노 지수를 측정한 의료진이 지난달 26일 서울 중곡동 국립정신건강센터에 좌담회를 열고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유빈 정신응급진료실장, 조근호 정신건강사업과장, 임선진 노인정신과 전문의, 이원혜 심리건강과장, 최정원 소아청소년정신과장. 사진=류효진 기자

진료 대상으로 섭외한 이들은 중학교 3학년 A양과 워킹맘 B씨, 남ㆍ여 직장인 C(47)씨와 D(41)씨, 그리고 노인 E(83)씨 등. 5명 모두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들로 과연 한국 사회 평범한 이들의 분노지수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보기 위한 거였다. 이들은 청소년, 우울, 스트레스, 중독, 노인 분야에 각각 특화된 국립정신건강센터 소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5명으로부터 지난달 18~22일 대면 진료를 받았다. 대상자들이 작성한 분노, 스트레스 관련 설문 3종(공격성 질문지(AQ), 지각된 스트레스 척도(PSS), 전반적 스트레스 평가(GARS))의 결과는 임상심리 전문가의 분석을 거쳤으며, 지난달 26일 서울 중곡동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진단 결과를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다.

전문의들은 화나 분노는 분노조절 기능이 마비된 정신질환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피할 수 없이 겪는 갖은 스트레스가 ‘분노의 샘’을 시나브로 차오르게 하는데 진료를 받은 5명 모두에게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전문의들은 이들 5명처럼 2018년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 평범한 이들이 다양한 스트레스에 힘들어하다 사소한 일에 점점 더 많이 화를 분출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 고인 분노가 안으로 쌓이면 우울증으로, 외부로 과격하게 표출되면 ‘간헐적 폭발 장애’ 등으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청소년 : 학업 스트레스, 권위적 어른에 대한 적대감

올해 고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3학년 A양은 AQ 검사 결과 총점이 78점으로 정상 범위(여성 80점 이하)를 간신히 유지했다. 특히 세부적으로 언어적 공격성과 분노감이 각각 ‘중간 수준으로 높음’과 ‘경미하게 높음’을 나타냈다. 더구나 PSS 검사에서 스트레스가 ‘심한 수준’ 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질풍 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A양 또래들이 흔히 겪는 성적과 진학 문제, 친구와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비롯한 스트레스는 성인 못지 않다. 실제로 GARS 검사에서 ▦학교 ▦대인관계 압박감 ▦대인관계 변화 ▦금전적 문제 ▦사소한 일상 변화 ▦전반적 스트레스가 모두 높게 기록됐다. 심각한 분노로 표출되는 단계는 아니지만, 분노의 원인인 스트레스 수준은 상당하다는 의미다.

A양을 진료한 최정원 소아청소년정신과장은 “그간 학교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다가 최근 예전처럼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는 불안감이 상당했다”고 진단했다. 가정 형편으로 외고 진학이 좌절돼 일반고에 가야 하는, 본인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여건 역시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권위적인 어른들에 대한 적대감도 일부 나타났다. 최 과장은 “평상시에는 학교에서 클럽 활동을 통해 또래 친구들과 접촉점을 늘리고 편지나 이메일 등을 통해 가족과의 대화 기회를 더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워킹맘 : 가정에서 폭발하는 직장 스트레스

B씨는 고등학교 1학년인 딸과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둔 직장맘이다. B씨의 공격성 점수(53점)는 참가자 5명 중 가장 낮았음에도 PSS 검사로 확인된 스트레스는 ‘심한 수준’을 기록했다. B씨는 ▦일과 직업 ▦병 또는 상해 ▦금전적 문제 ▦자연재해나 사고로 인한 스트레스를 최근 겪었다고 했다.

B씨를 진료한 유빈 정신응급진료실장은 “자기 절제를 통해 분노를 잘 조절하고 있지만, 2년 전 자녀 양육을 책임졌던 시어머니가 건강상 이유로 자녀들을 돌 볼 수 없게 되면서 양육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자기 절제에도 한계가 있다. 유 실장은 “B씨의 경우 겉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일상에서 육아와 직장과 관련해 지속적으로 강한 압박을 받고 있어 육아와 직장 중 하나라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면 잠재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며 “1차적인 분노 대상이 남편과 자식들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B씨가 실제 집에서 ‘왕짜증 엄마’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 실장은 “B씨는 분노, 우울, 스트레스 등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는 대다수 워킹맘들이 갖고 있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남성 직장인 : 분노→술→분노

기업에서 ‘만년 차장’으로 일하는 C씨는 공격성 총점이 72점으로 정상 범위를 보였지만 세부적으로 적대감은 꽤 높은 수준이었고, 스트레스 역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사소한 부정적 일에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해 원망스러움, 억울함, 적대감, 반감 등의 감정을 쉽게 경험하는 경향이 뚜렷한 것으로 진단됐다.

조근호 정신건강사업과장은 “C씨는 직장에서 일 자체에 대한 회의감과 스트레스, 선후배 임직원들과의 관계설정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며 “B씨가 택한 유일한 탈출구가 음주였다”고 분석했다.

C씨는 1주일에 2, 3회 정도 술을 마신다. 주량은 소주 2병 가량. 아직까지 술로 인해 직장과 가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내재된 분노를 술로 해결하려다가 결국 주객이 전도돼 술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진단이다. 조 과장은 “40대 후반 남성들은 직장과 가정에서 자신의 입지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광범위한 스트레스를 겪는다”며 “이런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 세대가 고령화하면 알코올 남용으로 인한 가정 붕괴 등 사회적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 중간관리자 : 불안한 샌드위치

기업의 중간 관리자급인 전문직 여성 D씨는 공격성 점수가 75점으로 정상 범위(80점 이하)를 간신히 유지했지만, 언어적 공격성과 분노감은 각각 ‘중간 수준으로 높음’ ‘경미하게 높음’으로 나타났다. D씨는 스트레스는 중간 수준으로 높았고 ▦일, 직업 ▦대인관계 압박감 ▦전반적 스트레스를 최근 경험했다. 최근엔 ‘번 아웃’(소진) 증세까지 호소한다. 심민영 불안스트레스과장은 공격성의 원인으로 “업무 수행과 직장 내 인간 관계와 관련한 압박감이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D씨의 직장 스트레스는 40대 직장인이면 일반적으로 겪을 수 있다는 것이 심 과장의 설명. 20, 30대 주니어 시절에는 혼자만 뛰어나도 조직에서 칭찬받고 인정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중간 관리자가 되는 30대 후반, 40대 초반에는 윗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다 부하 직원으로부터 일을 너무 시킨다는 원성을 듣거나, 부하 직원을 인간적으로 대하려다 성과가 떨어져 상사에게 지적 받기 십상이다. ‘나는 열심히 했는데 왜’라는 생각에 분노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심 과장은 “특히 여성은 직장에서 고위직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적은 편이어서 이런 부분에 대한 회의감까지 더해질 수 있다”면서 ▦완벽주의적 성향을 내려 놓고 ▦휴식도 업무처럼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철저히 이행할 것을 조언했다.

노년 : 건강 걱정, 정치 걱정

80대 E씨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하는 등 또래에서 드문 고학력자로 지금도 주기적인 봉사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비교적 여유로운 노년이다. 진단 결과, 공격성 점수는 정상 범위였지만 스트레스는 ‘경미하게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병 또는 상해’가 근심의 주 원인이었다.

임선진 노인정신과 전문의의 진단 결과 E씨는 8년전 겪은 전립선암과 부인의 췌장암 병력이 돌덩이처럼 마음을 누르고 있는 상태다. 본인이나 부인이 조금만 건강이 나빠져도 덜컥 겁부터 나 스트레스를 느낀다. 임 전문의는 “그 밖에도 주변에 친한 사람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면서 상실이 반복되는 상황 역시 스트레스를 주고 있고, 어엿한 직장을 다니는 40대 아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상황도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E씨는 정치ㆍ사회 문제에서도 일부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분석됐다. E씨는 “평소 거의 화를 낼 일이 없지만, 정치 문제만 생각하면 화가 치솟는다. 그래서 친구들과 모이면 화를 내는 수준으로 격한 감정을 토로한다”고 말했다. 여성 노인의 경우 자식의 분가에 따라 생기는 관계 단절에서 오는 상실감 등 가정 내의 변화에 더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반면, 남성 노인은 정치ㆍ사회적 여건에 비교적 더 민감하다는 것이 임 전문의의 설명이다. 임 전문의는 “우리나라 노인들은 젊어서 부모님 봉양과 자식들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했음에도 나이 들어서는 봉양도 존경도 받지 못한 채 요양기관으로 가야 하는 세대”라면서 “일반적으로 이 점이 분노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국립정신건강센터 자문단 명단(가나다 순)

심민영 불안스트레스과장, 유빈 정신응급진료실장, 이원혜 심리건강과장, 임선진 노인정신과 전문의, 조근호 정신건강사업과장, 최정원 소아청소년정신과장

사진=한국일보 DB
사진=한국일보 DB
1_분노조절지수/2018-01-08(한국일보)
1_분노조절지수/2018-01-08(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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