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창업자 야스다 다카오

도쿄 명문대까지 졸업했지만
밤거리 방황하며 타락한 삶
훗날 심야시장 개척 밑거름
‘도둑시장’이란 가게로 시작
‘압축 진열’ ‘팝 홍수’ 특징
지역의 명물로 자리잡아
1989년 돈키호테 1호점 가동
상품 구매부터 가격 책정까지
직원들에게 과감한 권한 위임
올해 400개 매장서 매출 8조원
지난달 일본 교토에 들어선 메가돈키호테 내부. 다양한 식음료 상품이 어지럽게 진열돼 있다. 돈키호테 제공

돈키호테(Don Quixote).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가 쓴 소설이자 주인공 이름이기도 한 돈키호테는 창조된 지 400년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이 친숙하게 떠올리는 인물이다. 비쩍 마른 말에 몸을 실은 그가 자신의 이상에 사로잡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은 무모해 보이는 영웅의 상징이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일본에 가 본 적이 있다면 다른 그림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진열대와 좁은 통로, 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상품 진열,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형형색색 가격표. ‘돈돈돈 돈키~ 돈키호~테’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단순한 멜로디의 CM도 귓가를 맴돈다. 식품부터 의류, 전자제품 등 없는 게 없는 할인 유통점 돈키호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돈키호테라는 상호는 창업자인 야스다 다카오(安田隆夫ㆍ68) 회장이 1989년 3월 일본 도쿄(東京)도 후추(府中)시에 1호점을 열며 직접 붙인 이름이다. 간판을 달았을 때 눈에 잘 띄고, 기억하기도 쉬운 이름을 고민한 끝에 선택했다. “유통업계라는 거대한 풍차를 상대로 기존 권위나 상식을 타파해 나가자는 다짐을 담았다”고 야스다 회장은 말한다.

그의 염원은 실현됐다. 물건을 찾기 어렵고 집기 어렵게 진열, 아르바이트생에게 판매ㆍ진열 등 모든 권한 부여, 퇴사 직원 재입사 환영 등 업계의 상식을 뒤집은 돈키호테의 운영 방식은 29년 연속 성장이라는 눈부신 성과를 낳았다. 돈키호테의 평당 매출은 업계 평균의 10배에 이르며,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동안 오히려 매출은 700배, 경상이익은 무려 3,600배 증가했다.

돈키호테는 지난달 400번째 매장을 열었다. 2017 회계연도(2016년 7월~2017년 6월) 매출 8,287억엔(약 8조원)을 기록했고, 이제는 ‘2020년 1억엔 돌파’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14년 9월 30일 돈키호테 창업자인 타카오 야스다 회장이 일본 도쿄의 한 지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도쿄=로이터
일용직과 도박으로 점철된 20대

야스다는 1949년 5월 기후(岐阜)현 오가키(大垣)시에서 태어났다.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뒤늦게 학구열에 불타올랐다. 흥미로운 일이 넘쳐날 것만 같은 도쿄로 가고 싶어서였다. 목표가 생기니 집중력이 솟았고, 그는 도쿄의 명문 게이오(慶應)대 법학부에 합격했다.

막상 입학해서는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석이 잦아 1학년 때 유급 처분을 받게 됐는데, 이 사실을 안 아버지는 학비와 생활비 지원을 끊었다. 아버지에게 머리를 숙이고 싶지 않았던 야스다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요코하마(橫濱)항에서 노역을 했다. 그즈음 마작을 배웠다. 힘들게 벌어들인 돈을 뜯기는 게 억울해 작정하고 연구를 거듭한 결과 3학년 무렵부터는 잃는 일이 드물었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해 들어간 첫 직장은 이름 없는 부동산회사였다. 게이오대 출신이라 하면 번듯한 대기업에도 취직할 수 있었지만, 작은 회사라면 빨리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고 부동산 업종은 노하우만 쌓으면 독립하기도 쉬울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회사는 허망하게 도산했다. 입사한 지 불과 10개월 만이었다.

실업자 신세가 된 뒤 생활비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그때 그의 머리를 스친 게 있었으니, 바로 마작이었다. 고수 못지않은 실력을 자랑하던 야스다는 매일 저녁 마작장으로 출근해 밤을 꼴딱 새고 집에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어찌 보면 타락한 삶 그 자체였지만, 밤거리를 하릴없이 배회하던 시간은 훗날 방황하는 청춘의 아픔을 위로하는 돈키호테식 마케팅 기법, 심야 시장 개척의 밑거름이 됐다”고 그는 말한다.

일본 시즈오카 시내의 돈키호테. 모든 돈키호테 점포는 멀리서도 눈에 띄도록 노란색의 큼지막한 간판을 달고 있다. 이서희 기자
돈키호테를 만든 건 팔할이 ‘도둑시장’

그가 하루살이 인생에 마침표를 찍고 사업으로 승부해보자는 마음을 먹은 건 30대를 앞둔 때였다. 마작 외에는 재주도 기술도 없고, 붙임성도 부족했던 야스다는 당시 전국에 생겨나기 시작한 할인점을 주목했다. 전 재산 800만엔을 종잣돈 삼아 10여 평 점포를 빌린 그는 도산한 기업 등에서 나오는 재고 물품을 팔기로 했다. 초짜 상인이라 문전박대당하기 일쑤, 수십번 도매업체 문을 두드린 끝에 공급처를 확보했다. 그리하여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해, 첫 가게 ‘도둑시장’이 세상과 만났다. 괴상한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단 하나, 어떻게든 눈에 띄기 위해서였다.

독특한 가게 이름이 한몫했는지 처음에는 손님들이 몰려왔지만 머지않아 파리만 날리기 시작했다. 하루 매상이 2,000엔밖에 안 되는 날도 허다해 상품을 넉넉히 확보하지 못했다. 팔 상품이 없으니 손님이 오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망하지 않기 위해 그는 다른 방식을 고민했다. 그러다 떠올린 묘안은 견본품(샘플)이나 흠집 난 상품, 반품된 물건 등을 떼다 싼값에 파는 것이었다. 어차피 폐기될 이런 제품들은 헐값에 매입할 수 있었고, 가게는 금세 수많은 잡동사니로 가득 찼다. 볼펜이나 일회용 라이터 등에 단돈 10엔, 20엔이라는 가격이 붙었다. 너무나 싼 가격을 보고 종종 묻는 손님도 있었다. “정말 훔쳐 온 물건을 팔아서 가게 이름이 도둑시장인 건가요?”

도둑시장의 물건들은 공급이 비정기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잘 팔린다고 해서 추가로 들일 수 없고, 오직 폐기 처분을 받을 때만 구입 수 있었기 때문에 물건이 나올 때마다 모조리 사들였다. 선반마다 상품들을 채워 넣고도 모자라 맨 위 선반에는 상자를 천장까지 쌓아 올려야 했다. 통로 또한 상품과 상자들로 빼곡해 가게는 흡사 정글 속 미로 같았다.

문제는 마냥 쌓아놓기만 해서는 무슨 물건을 파는지 알 길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야스다는 상자에 작은 구멍을 낸 뒤 손으로 직접 쓴 팝 광고를 일일이 붙였다. 이것이 돈키호테의 명물이라 불리는 ‘압축 진열’과 ‘팝 홍수’의 시작이었다. 신기하게도 압축 진열을 시작한 이후 손님들의 반응이 더 좋아졌다. 사람들은 마치 보물찾기 하듯, 뭔가 희귀한 물건이 없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게를 뒤졌다.

그는 손님들이 빠진 늦은 시각이 되면 재고 정리와 가격표 붙이는 일 등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청년이 “지금도 영업하는 거냐” 물었고,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싶었던 야스다는 그를 들였다. 밤의 손님은 환한 낮에 깐깐하게 따져가며 장을 보는 주부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술을 한잔 걸친 덕분인지 쓰레기 더미 같은 데서 이리저리 물건을 찾으며 즐거워했다. 이를 보며 깨달음을 얻은 그는 본격적으로 심야 영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동네 편의점은 11시까지 영업했는데, 도둑시장은 자정까지 문을 열었다. 밤의 경제학은 훗날 돈키호테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일본 시즈오카 시내의 돈키호테 내부. 다양한 상품이 어지럽게 진열돼 있고, 알록달록한 가격표와 상품 설명이 곳곳에 붙어있다. 이서희 기자
믿고 맡겨라, ‘창자의 힘’을 길러라

개업 2년 뒤 도둑시장은 지역 명물로 자리 잡았다. 장사가 잘 되니 물건 공급이 늘었고, 도둑시장만으로는 감당이 안 돼 다른 할인점으로 돌리는 일이 종종 생겼다. 몇 번 반복되자 다른 점포에 상품을 중개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사업이 됐다. 중간도매상이 된 셈이었다.

야스다는 과감하게 도둑시장을 팔고 1983년 도매 전문회사 ‘리더’를 세웠다. 리더는 설립 수년 만에 연 매출 50억엔을 넘어설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런데 단골 할인점 주인들은 폐업이 잇따랐다. 도둑시장처럼 상품의 밀도를 높여 정글식 매장을 만들라고 노하우를 전수해도 그들은 그저 물건을 팔려는 장삿속으로만 받아들일 뿐이었다. 직접 소매점을 운영하며 자신의 노하우가 옳다는 점을 증명해 보이고, 체인 형태로 전수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다. 마침내 야스다는 1989년 돈키호테 1호점을 열며 다시 소매업에 뛰어든다.

돈키호테가 처음부터 잘 나간 건 아니다. 돈키호테는 도둑시장과 달리 100평 이상의 대형 점포라 예전처럼 야스다 혼자서 모든 걸 도맡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압축 진열을 보여주며 방법을 전수했는데, 직원들에게 맡기면 비슷한 듯하지만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 그저 제품을 잡다하게 산처럼 쌓아 올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야스다는 직원들에게 화를 했고, 하나둘 그만두는 이들이 늘었다.

이 과정을 겪으며 야스다가 내린 결론은 직원을 가르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반대의 방법을 쓰기로 한다. 직원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직원마다 담당 구역을 정하도록 한 뒤 상품의 구매에서 진열, 가격 책정, 판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과감하게 위임했다. 도둑시장 시절 자신의 상황으로 직원들을 밀어 넣자, 그들은 근면하고 맹렬한 일꾼으로 변신했다.

야스다는 이렇게 직원들에게 믿고 맡기는 경영방식이 돈키호테의 유전자(DNA)라고 말한다. 이는 일본과 싱가포르, 미국 하와이 등에 400여개 점포를 둔 지금도 유효하다. 돈키호테는 본부에 정보와 권한을 집중시켜 점포 운영의 표준화를 꾀하는 다른 프랜차이즈 업체들과 달리 상품 구매부터 가격 설정, 매장 구성까지 모든 권한을 현장에 일임하고 있다. 대신 성과는 가혹하게 따진다. 6개월마다 연봉을 조정하고, 점장이 점원으로 점원이 점장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야스다는 회사의 틀을 완전히 다졌다고 생각한 2015년 경영권 없는 회장직으로 물러났다. 그는 돈키호테 사원들에게 ‘창자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창자의 힘이란 삶과 경험을 통해 쌓인, 무슨 일이 있어도 헤쳐 나가겠다는 의지와 신념이다. “현실이란 전쟁에서 가장 필요한 무기는 창자의 힘이다. 창자 힘이 있다면 격변의 시대에도 놀라울 만큼 효율적으로 성공의 계단을 뛰어 올라갈 수 있다.”

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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