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을 느끼는 감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즐거워하는 코드가 다른 이에게는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즐거움이 웃음으로 나아간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학창시절을 통틀어 친구와 다툰 일이 단 한차례 있었다. 나는 우스타 교스케의 ‘멋지다 마사루’를 좋아했다. 그런 나에게 내 친구는 하마오카 겐지의 ‘괴짜가족’을 추천했다. 그걸 읽으면 몸을 구르며 꽥꽥 웃어댈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말고사를 하루 앞둔 겨울날, 서로 좋아하는 만화책을 교환했다.

나는 ‘괴짜가족’이 너무 길고 지루했다. 수학 교과서가 더 재미있었으므로 시험공부 따위에 몰입했다. 다음날 만난 친구는 ‘멋지다 마사루’가 너무 이상해서 내용을 모르겠다며 목청의 볼륨을 키웠다. 둘의 감상이 너무 다른 탓에 우리는 몸을 구르며 꽥꽥 다투어야 했다. 화해를 위해 각자의 포켓몬 스티커를 바꾸었다.

어른이 되어 비슷한 경험을 또 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보면서, 특히 눈밭을 밟는 장면에서 나는 영화관이 울리도록 웃었다. 그러나 같이 영화를 보던 선배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타격연습장에서 야구공을 쳤다. 너무 한심하고 저질스러워서 참고 보기 어려웠다고 했다.

나는 저질이 아닌 고질이므로 토를 달지 않았다. 선배가 야구배트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감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정가영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하는데 어느 영화잡지에 실린 리뷰에는 ‘비치 온 더 비치’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고 써있었다. 그 또한 같은 이유일 것이다.

웃음을 유발하는 고전 공식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일이다. 콧수염 달린 사람이 갑자기 넘어지는 슬랩스틱부터 눈알을 움직이는 코미디언의 몰래 카메라까지,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끌어낸 걸작들은 모두 예상을 뛰어넘었다. 다만 파격을 미리 예상했던 사람은 웃지 않을 테고 파격을 감당 못한 사람은 당혹스러워할 터이다.

우리는 주변을 배려하여 웃음을 참을 때도 있다. 때로는 그럴수록 더 웃음이 새어 나온다. 멀찍이서 검거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몸싸움 도중 사복형사의 트레이닝복 바지가 벗겨졌다. 나는 돕지 못할망정 웃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었지만 허사였다. 경찰차 앞까지 끌려온 범인이 저항하다 사복형사의 바지를 한번 더 내렸을 때, 참았던 웃음이 한번에 터졌다.

웃음을 끌어내는 코드는 다양하다. 어떤 이는 자신의 상황보다 못한 모습을 보면 웃기도 한다. 이 경우, 웃는 사람은 웃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불편하다. 귀귀 작가의 웹툰이 그 예다.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선정적이라며 질타하는 반응도 있다. 지난 14일 한 보수신문은 귀귀 웹툰이 페미니스트를 비꼰다면서, 외설스럽고 수준 낮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내 생각에 그 웹툰이 읽히는 이유는 독자들이 자신은 그 작품에 비해 훨씬 똑똑하며 정상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B급 영화에 즐거워하는 감성과 비슷하다. 이는 작품 내용에 공감하거나 지지를 함과 무관하며, 오히려 거리를 둠으로써 생기는 웃음이다. 이런 웃음 또한 옳지 않다고 책망하여 억누른다면 더 커질 것이다. 그 웹툰의 문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에 공개하면서도 해야만 하는 말을 하지 않은 점뿐이다.

4년 전 TV 건강정보 프로그램에 가정의학과 의사가 나왔다. 의사는 대장암 발병 증가의 원인으로 서구화된 식생활을 꼽았는데, 그러면서 예방을 위한 음식으로 요거트와 치즈를 추천했다. 오늘날 온갖 질병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서구화된 식생활이란 이데올로기의 부산물일 뿐 아무 뜻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말이다. 해야만 하는 말과 자신의 견해가 충돌할 때 나오는 불일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웃음코드다.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런 재능은 없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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