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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페미니즘 교육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입력
2017.08.25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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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무력하다.” 청와대에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 사퇴에 대한 의견을 전했지만 어떤 조치도 없는 현 상황에 대해,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임기 여성으로 살면서, 나 역시 좀 무력하다. 지난달 칼럼의 주제를 정하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곧 사퇴하리라 믿고 언급을 보류했던 탁현민 행정관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불세출의 연출력’을 뽐내고 있을 때도 무력하고, 친구들이 아침마다 발암물질 생리대 리스트라든가 여성 관련 사건ㆍ사고를 공유할 때도 무력하다. 그리고 그런 사건에 더는 놀라지도 않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차라리 참담하다.

8월 26일 목요일, 단 하루 동안의 기사만 살펴보자. ‘여성 살해’로 검색하면 바로 70대 할머니를 성폭행하려고 시도하다가 살해한 30대 남성이 3년 전 다른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기사가 나온다. ‘여성 성추행’으로 검색하면 한국국제협력단 KOICA의 간부가 성추행을 자행한 의혹이 있으며, 징계 없이 면직 처리만 되었다는 기사가 상단에 뜬다. ‘데이트폭력’으로 검색하면 여자친구를 장검으로 수시로 구타했던 20대 남성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매일 정리해본다면 어떨까? 트위터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계정을 검색하면 여성에 대한 범죄를 정리한 내용을 매일 볼 수 있다. 한 달치를 쭉 살펴보는데, 꼬리에 달린 한마디가 눈에 띈다. 이런 나라에서, “대한민국 여성들, 오늘도 안녕하십니까.”

도대체 안녕할 수가 없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여성 혐오와 맞닿아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사건은 만연한 강간문화를 내버려 두고, 뿌리깊은 여성혐오를 인정하지도 교육하지도 않았던 지난날에 대한 사회적 대가이다. 이 땅의 젊은 여성들이 다시 페미니즘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소리가 더 크게 퍼져나가고 사회가 변화하는 계기가 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단순한 선언으로 시작된 SNS의 해시태그 운동이 지금은 어디까지 왔는가? ‘#그렇다고_여자를_죽이면_안됩니다’라는 해시태그가 어떤 절박함에서 시작되었는지 남자들이 과연 알 수 있을까? 여성이 혼자 일하고 있다고, 여성이 나를 보고 웃었다고, 여성이 길을 걸어간다고, 여성이 화장실에서 나온다고 여성을 죽이면 안 된다. ‘여성‘도 사람이다. 대한민국은 이 문장의 뜻을 알려줘야 하고, 알려줘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남자들로 가득한 나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 땅의 여성이 1분 1초도 안녕할 수 없는 이유를 아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

최근 유명 남성 BJ가 유명 여성 BJ 살해 협박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한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바로 다음에 왔다. 그 BJ에게 범칙금 5만 원의 처벌이 내려진 것이다. 찾아가서 마주친 여성이 타깃인 여성 BJ가 아니라 그 어떤 여자라 해도 죽이겠다고 말한 남자에게 5만 원을 선고하고는, 경찰은 이 사건이 ‘경미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 이제 남성들이 인정해야 할 때다. 이 나라에서 여성의 목숨은 경미하다. 이 나라의 남성들은 여성을 동등한 시민,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전히 매일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이 땅의 여성들은 오늘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운 좋게 살아남은 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이제라도 페미니즘 교육을 시작하자고. 비록 우리 세대는 실패했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니 그래도 같이 가 보자고. 그저 무력할 수만은 없는 이유를 겨우 하나 찾았다. 적어도 내 조카는 여성도 인간이라고 배워야만 한다. 새 세대의 여성은 안녕해야만 한다. 페미니즘 교육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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