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독일로 간 간호사들의 삶을 조명한 전시회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 가 개막한 지난 달 2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조국남(오른쪽에서 두 번째) 재독한국여성모임 대표를 비롯한 재독 간호사들이 전시회를 둘러보고 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한국에선 여전히 ‘파독간호사’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재독한인간호사’라 부릅니다.”

지난달 27일 만난 조국남(69) 재독한국여성모임 대표는 약 50년간 써왔던 명칭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파독간호사’라는 단어는 국가의 필요로 독일에 가게 됐다는 수동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당시 여성들의 독일행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한 능동적 선택이었다는 얘기였다.

‘가난한 가족의 명운을 짊어진 큰딸’, ‘남동생 학비를 책임지러 독일로 간 누나’. 1960년대 독일로 간 간호사들에 대한 익숙한 시선이다. 하지만 이 같은 국가주의적ㆍ가부장적 시각 뒤에는 50여 년간 자신의 삶을 개척하며 성장한 여성들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독일의 ‘손님노동자’ 초청, 새로운 문이 열리다

“내 인생에 다시는 그런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어요.” 1966년 신문에 난 파독간호원 모집광고를 본 안차조(72)씨는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당시 그는 집안 사정상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간호고등학교에 진학해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선진국인 독일에서 일하는 것은 지금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였다. 완고한 부모님께 용기를 내어 ‘독일에 가겠다’고 말했다. 화를 내실 거란 예상과 달리, 아버지는 “내가 널 많이 가르치지 못하니 가서 많이 배우고 오라”고 했다. 스물 한 살의 안씨는 그렇게 독일로 떠났다.

1960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간호사들이 공항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국일보자료사진

간호사들의 독일 이주는 1950년대 말부터 시작, 1960년대 중반에 정점에 달했다. 독일은 당시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하며 국민의 사회복지 수요도 높아졌다. 하지만 간호사 수는 태부족이었다. 독일 젊은이들 사이에선 높은 인내심이 필요한 간호사를 기피했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은 한국을 비롯한 세계 80여 개 국가의 간호인력을 ‘손님노동자(Gastarbeiter)’, 일종의 계약직 이주노동자로 받아들였다.

1969년 8월 박정희 정권의 해외인력수출정책을 전담하던 한국해외개발공사는 독일병원협회와 간호사 파견 공식 협정을 체결했다. 일부에선 당시 정부가 독일의 차관을 받기 위해 이들의 임금을 담보로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협정은 민간에서 이어오던 이주노동을 정부 차원에서 공식화하기 위한 약속이었다.

2008년 진실ㆍ화해과거사위원회(과거사위)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취업이 중단된 1976년까지 한국 간호인력 1만 1,057명이 이주했다. 1964년부터 1975년까지 파독 인력의 송금 총액은 1억7,000만 달러, 이들이 한 해 송금한 돈은 당시 연간 국가수출액의 약 2%에 달했다.

1964년 12월10일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두이스부르크 두르공업단지에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격려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 작은 사진은 눈물을 흘리는 간호사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들이 오직 경제적 이유만으로 독일로 간 건 아니었다. 여성에게 순종만을 강요하는 가부장적인 사회 그리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현실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선택한 사람도 상당수다.

송금희(69)씨는 “남자는 연애해도 상관없는데 여자는 연애하면 결혼 못한다는 등 남녀평등을 부정하는 어른들의 말이 이해가 안됐다”며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갈망으로 독일행을 택했다”고 말했다. 김순임(73)씨는 “독일에 가기 전 여권이 안 나와 전전긍긍했는데 친척을 통해 누군가에게 돈을 건네니 다음날 바로 여권이 나왔다”며 “이를 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출국했다”고 회상했다. 1975년 유도진 현 경희대 명예교수가 파독간호사 538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0.1%만이 경제적 이유로 독일행을 택했으며 59.9%는 외국 생활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 등으로 독일에 가게 됐다고 답했다.

독일에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 사람도 많았다. 김영희(68) 전 세르비아 대사는 간호보조원으로 독일에 갔다 대학에 진학해 외교관이 됐다. 경제사정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했었던 그는 주경야독으로 독일 쾰른대에 입학했다. 이후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교수생활을 하던 그는 독일전문가 특채로 외교무대에 섰다. ‘누구나 가슴속엔 꿈이 있다’라는 에세이를 펴낸 이영숙(66)씨 역시 일곱 자매의 맏딸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독일행을 택했지만, 이후 독일 취빙겐 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됐다.

“우리는 상품이 아니다”

독일에서의 간호사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이주노동자’였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의 기억 때문에 당시 독일사회에서 인종차별은 금기였지만, 여전히 한국 간호사들은 ‘노란천사’ ‘갸름한 눈의 천사’ 등 인종적 편견이 담긴 호칭으로 불렸다. 업무스트레스도 컸다. 독일의 간호사는 한국과 달리 간병인이 하는 병수발까지 도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힘든 건 이주노동자를 오직 ‘노동력’으로만 보고 정을 나누지 않는 태도였다. 하지만 한국인 간호사들은 특유의 성실함을 발휘해 묵묵히 일했고, 점차 동료로 인정받게 됐다.

1960년대 한국 간호사들이 독일의 한 병원 앞을 걷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1976년 이들에게 큰 시련이 닥쳤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오일쇼크로 독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자국민 일자리가 부족해진 독일 정부가 외국인 노동자의 추가 유입을 불허하고, 기존 이주노동자들의 귀국을 종용한 것이다. 급기야 이듬해엔 일부 한국 간호사들이 강제 귀국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간호사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돌아보게 됐다. 조국남 재독한국여성모임 대표는 “독일 병원이 필요해서 불러놓고는 정작 경제가 어려워진 뒤 가장 먼저 해고하는 건 외국인 노동자, 그 중에서도 약자인 여성노동자라는 것을 깨닫고 분노했다”고 회상했다.

독일 전역에서 일하던 간호사들은 똘똘 뭉쳐 강제소환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독일인 동료들과 연대해 서명운동을 펼치고 집회를 열어 독일정부에 공개질의를 했다. 결국 1978년 독일 정부는 이들의 체류와 노동을 허가했다. "우리는 상품이 아니다"며 독일 당국과 논쟁을 벌인 한국 간호사들의 당찬 모습에서 독일인들은 스위스 출신 작가 막스 프리슈의 독일 이주노동정책 비판 문구를 떠올렸다고 한다. “노동력을 불렀더니, 사람이 왔네(Wir riefen Arbeitskräfte, und es kamen Menschen)”

‘두 개의 뿌리’로 자라난 더 울창한 나무

이후 한인 간호사들은 재독 한인 1세대로 독일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태어나고 자란 한국땅에 내린 뿌리를 외면할 순 없었다. 특히 한국 여성의 인권과 관련한 문제에선 더더욱 그랬다. 그들의 언니와 동생이 겪을법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강제귀국반대운동으로 결성된 재독한국여성모임은 한국 여성들의 노동환경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냈다. 1978년 ‘동일방직 똥물사건’이 발생했다. 인천의 섬유회사 동일방직에서 여성이 노조지부장으로 선출되자 정부와 사측이 이를 탄압했고, 파업으로 맞서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뿌린 뒤 해고한 사건이다. 소식을 들은 재독 간호사들은 조국의 모습에 실망하고 분노했다. 사건을 다룬 ‘공장의 불빛’이라는 연극을 직접 연습하고 서독 전역에서 공연해 한국의 현실을 알렸다. 모금한 돈을 보내 한국에 있는 ‘여공’ 자매들을 도왔다.

1990년대 이후 재독 한인 간호사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독일에 알리고 피해자들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활동을 해왔다. 재독한국여성모임 제공.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데도 앞장섰다. 재독 한인 간호사들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국제연대소위원회’를 만들고 피해자 증언집을 독일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200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 2001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법정에 참석해 증언을 돕기도 했다.

한국의 민주화 역시 이들의 관심사였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부터 1987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간호사들을 비롯한 재독 한인들은 독일사회에 한국의 현실을 알리고, 독일정부기관에 협력을 요청하는 공개시위를 했다. 안씨는 “당시만 해도 이념 갈등으로 교민사회역시 경직되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면 ‘빨갱이’라 불리기 일쑤였지만, 민주화의 주요 국면에서는 교민들도 늘 하나로 모였다”고 말했다.

한국 이주노동자도 ‘우리’와 같다

재독 한인 여성들은 지난 50년을 돌이켜 ‘시냇물에서 바다로 나와 성장해온 과정’이라 말한다. 갓 전쟁의 굴레를 벗어난 작은 나라를 떠나 독일이라는 넓은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경험을 통해 여성의 권리, 이주민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으로 온 외국인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이주노동자로서 견뎌온 지난날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김순임씨는 “외국인에게 노동권을 똑같이 보장해주던 독일 사회에서조차 이방인으로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며 “꿈을 안고 한국에 오는 이주노동자들을 과거 파독간호사ㆍ광부와 똑같이 생각하고 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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