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대선 결과를 보면 한국에서 지역갈등은 마침내 사라지는 단계에 온 것 같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세대갈등이 들어서는 듯하다. 영남과 호남이 맞서고, 그 사이에서 충청이 역할을 했던 구도는 이제 이런 식으로 바뀌지 않을까. 베이비붐 세대와 88만원 세대가 맞서고 그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 캐스팅보트를 쥐는.

그런데 그 구도는 얼핏 비슷해 보일지라도, 갈등이 펼쳐지는 양상과 결은 이전과 매우 다르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어쩌면 더 풀기 어렵고, 골이 훨씬 깊어질 수 있겠다는 걱정도 든다.

우선 청년과 노인들이 선입견 없이 만나 수평적으로 대화할 기회 자체가 극도로 적다. 지역감정이 한창일 시절에도 사람들은 학교나 직장에서 서로 어느 지역 출신인지 모른 채로 만나 섞일 수 있었다. 일을 같이 하고, 우정을 쌓고, 심지어 연애를 한창 하다가 뒤늦게 상대방의 고향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게 꼭 상대 집단에 품고 있던 반감을 버리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 88만원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어렵다. 특히 빈곤 청년과 부유한 노인이 얼굴을 보고 평등하게 의견을 나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유교 문화의 문제도 있고, 대개 빈곤 청년과 부유한 노인은 머무는 공간 자체가 분리된다.

갈등의 결은 어떨까. 영호남 사이의 적대감은 일종의 ‘악마화’였다고 본다. 지역갈등의 당사자들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그들’을 ‘나쁜 놈들, 교활한 인간들’로 묘사했다. 그런데 이때 ‘그들’은 적어도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지성이라는 면에서는 우리와 같은 존재였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 종교전쟁 시대 구교도와 신교도가 상대를 이렇게 봤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세대갈등은 그와는 다소 다른 듯하다. ‘악마화’라기보다는 ‘비인간화’에 가깝지 않나 싶다. 세대갈등의 당사자들 역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한다. 그런데 이때 ‘그들’은 사악하다기보다는 차라리 ‘덜 떨어진 인간들’이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이 유색인종을 보던 태도에 가깝다.

젊은 세대는 노인들이 쓰는 거친 언어와 난폭한 행동에 경악한다. ‘그들’은 둔하고, 볼품없고, 촌스럽다. 인권을 비롯해 현대사회 시민이 지녀야 할 기초적인 개념과 소양을 두루 못 갖춘 것 같다. 몰상식한 주제에 억지까지 부린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종종 ‘역겹다’는 것이다.

노인 세대는 요즘 젊은이들이 약하고 얕다고 여긴다. 나는 얼마 전 어느 장례식장에서 전직 관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88만원 세대에 대한 이들의 솔직한 정서는 ‘같잖음’인 듯했다. 정돈된 거대담론에 익숙한 과거의 엘리트들에게 ‘그들’의 중구난방 주장은 일관성이라고는 없이 그저 엉성해 보일 뿐이다. ‘그들’ 중 며칠 굶어 본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악마화는 증오로 이어진다. 비인간화의 정서는 경멸이다. 어떤 면에서는 증오가 경멸보다 쉽게 풀린다. ‘그들’이 굴복하거나 참회하면 된다. 경멸은 그런 식으로는 사라지지 않는다. 상호경멸이라는 형태로 반목하는 두 집단이 상대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려면 어떤 기적이 일어나야 할까. 최근에는 갈등의 모양새가 비인간화 위에 악마화까지 덧씌워지는 모습으로 변하는 중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정치가 해결책이 될까.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과거에도 지역갈등 극복을 위해 애쓴 정치인보다는 갈등을 이용하고 조장하기까지 한 모리배들이 더 많았다. 수가 적어도 튼튼한 지지층을 확보하려는 전략들이 들어서면 정치는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고 키우는 증폭기가 된다. 선거가 연령 단위가 아니라 지역 단위로 시행된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경제 상황은 더 암울하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모든 사회갈등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경제성장을 내세웠는데, 이제 그 약을 더 구하기 어렵게 됐다. 수명이 길어지고 고령층이 경제적으로 붕괴하면서 빈곤 노인과 빈곤 청년이 일자리와 복지재원을 둘러싸고 점점 더 치열하게 다투게 될 것이다.

이 칼럼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몇 십분 째 헤매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 세대가 잘 모르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를 하나씩 추측해 써볼까 한다.

하나, 개인주의와 인권 감수성은 언어와 같다. 몇 시간 동안 공부한다고 저절로 몸에 익지 않는다. 그리고 성, 인종, 성적 지향에 대한 인권의식이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온 건 선진국에서도 상당히 최근 일이다. 나를 비롯한 기성세대들은 지금 외국어를 배우느라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기본적으로 서툴고, 아는 것도 자꾸 틀린다.

둘, 사람을 정말 괴롭히고 좌절시키는 것은 배고픔이 아니라 전망이 안 보이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믿음’ 속에 태어나 자란다는 것은 전체 인류 역사에서 몇몇 세대에게만 허락되는 일종의 은총이자 특권 아닐까. 한국의 젊은이들은 현재 그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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