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는 현충일과 6ㆍ25기념일이 들어 있는 6월이 오면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이른바 순국열사를 기리는 웅변대회가 불을 뿜었다. 수백 명이 참관하는 교내대회뿐만 아니라 수천 명의 청중이 운집한 군·시 단위의 대회도 곳곳에서 열렸다. 원고는 선생님이 써준 듯한 한자어 어투가 섞여있어 좀 어색했지만,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현창하고 그 위업을 계승하겠다는 다짐만큼은 간절하게 느껴지는 열변이었다.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 현충일이나 6ㆍ25기념일을 맞아 초중고등학교에서 선열을 기리거나 충성을 부르짖는 웅변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조용히 현충일의 뜻을 헤아려보거나 애국심을 가다듬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국가가 지정한 기념일이자 법정 공휴일의 하나로 받아들이며 즐기는 것 같다. 칼날 위에서나마 평화가 지속되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이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으니 무심함을 탓할 수도 없다. 세월과 인심이 무상하니 현충일의 유래나 더듬어보며 위안을 삼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6ㆍ25전쟁 중인 1951년부터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분들의 합동 추모식을 산발적으로 거행했다. 그러다가 1956년에 6월 6일을 현충기념일(공휴일)로 정하고 1975년에 이날을 현충일로 바꿔 불렀다. 현충일의 목적은 국권 회복과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하여 헌신하거나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호국용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데 있다. 현충원은 그들의 넋을 국민의 이름으로 모시고 그 충의와 위훈을 계승하기 위해 마련한 겨레의 성역이다. 6월 6일을 현충일로 정한 것은 청명과 한식에 사초와 성묘를 하고 망종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존중한 때문이었다. 우리민족 최대의 수난이자 희생인 6ㆍ25전쟁을 잊지 말자는 염원도 여기에 담았다. 추모의 대상은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모든 선열이다.

그런데 현충일과 현충원의 연원을 찾다보면 대한제국에 맥이 닿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종 황제는 1900년 9월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쌓고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을 지었다. 황태자 순종은 ‘奬忠壇’이라는 휘호를 웅장하게 써서 비석에 새겼다. 그리고 을미사변(1895.10, 일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만행)에서 순사한 장병의 넋을 여기에 모셨다. 대한제국은 매년 봄ㆍ가을마다 그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명성황후를 지키다가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등을 제향(祭享)했으나, 나중에는 창선(彰善)ㆍ표충(表忠)의 대상을 임오군란ㆍ갑신정변 당시 순의(殉義)ㆍ사절(死節)한 문신까지 포함시켰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쏘았다. 근대국가의 의무인 현충일과 현충원은 이렇게 탄생했다.

일본은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폐멸하고 장충단도 폐지했다. 1920년대에는 장춘단 일대에 벚꽃 공원을 조성하고, 그 앞에 공창지대인 유곽(遊廓)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상해(上海) 침공 결사대인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보리사(菩提寺)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하였다. 대한제국의 현충원인 장충단이 뭇사람의 놀이터, 침략자를 숭앙하는 장소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한 셈이다. 나라가 망한 업보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광복 후 당연히 육탄삼용사의 동상은 철거되고 이토 히로부미의 박문사는 불타 없어졌다. 6·25전쟁을 겪으며 장충단의 사전과 부속 건물도 파손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장충단은 신생 대한민국의 현충원으로서 다시 살아났다. 해마다 무장공비와 싸우다 희생당한 장병을 기리는 합동추모제를 장충단에서 거행하고, 그들의 넋을 새로 보수한 장충사(將忠祠)에 봉안(奉安)했다. 6ㆍ25를 불과 나흘 앞둔 1950년 6월 21일에도 지난 1년여 동안 순국한 1,664주의 넋을 장춘단에 모셨다. 이날은 임시 장충공휴일로 지정되어 집집마다 조기를 게양했다. 온 국민은 오전 10시 사이렌 소리에 맞춰 장충단을 향해 1분간 경건하게 묵념을 올렸다.

6ㆍ25전쟁을 겪으며 순국선열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장충단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국군은 여러 길지(吉地)를 물색한 끝에 1953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동작동을 국군묘지로 선정했다. 그리고 3년 가까운 조성공사를 거쳐 1956년 6월 6일 이곳에서 현충기념식을 거행했다. 현충일과 현충원의 새 시대가 막을 연 셈이다. 그렇다고 하여 장충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다수 국민이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노래할지라도 그 속에는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근간을 이루는 처절하고 장엄한 현충의 역사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인기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