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소다]<36>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주기

지난해 5월18일 시민들이 서울 강남역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살해된 여성을 추모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서울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주기를 맞이한 가운데 한 커플이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지난해 5월 서울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격렬한 성(性) 갈등으로까지 확대되면서 당시 많은 남녀 커플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분노했다. 남성들도 이런 여성의 생소한 모습에 놀라고, 당황스러워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이성 커플들이 강남역 사건의 여파로 논쟁과 싸움에 돌입했고, 일부는 결국 파국에 이르기도 했다.

그 후 1년이 지났다. 강남역 사건 이후, 성 평등을 기조로 한 페미니즘 운동의 여파 속에 남녀 커플들에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논쟁 과정에서 확인된 남녀 커플들의 인식 차이는 어떻게 수습했을까.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를 맞아 강남역 사건 당시 갈등을 겪었던 다섯 커플을 만나봤다.

이현이현정씨가 지난해 강남역 사건 발생 이후인 2016년 5월20일 새벽 2시 남자친구인 허정기씨에게 보낸 카톡 내용. 이현정씨 제공
1. 강남역 살인사건의 발생과 충격
울면서 전화하던 너… 새벽 2시에 갑자기 ‘까톡!’ “넌 어떻게 생각해?”

남녀 커플들은 지난해 강남역 사건의 발생 직후 전화와 카카오톡 메시지 등으로 강남역 사건을 풀어갔다. 남자친구는 여자친구의 ‘희생자가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공포에 깜짝 놀랐다.

이현정(24)씨는 강남역 사건 후 나흘이 지난해 5월 20일 새벽, 남자친구 허정기(28)씨에게 갑자기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있잖아 오빠 이제 자야 하는 거 알지만...오빠는 이번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이 씨는 “여성혐오 문제에 대해서 남자친구가 저랑 같은 생각일거라고만 생각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안 해봤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허씨는 “여성들의 일상 속 공포가 심하다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자친구가 낮에도 인적 없는 골목길을 걸을 때 사람이 뒤에서 걸어오면 무섭다고 한 이야기를 듣고 그 정도였구나, 하고 놀랐다”고 말했다. 강남역 사건 이후에도 여성대상 범죄 보도가 이어지자 지난해 여름 허씨는 이씨에게 찌르는 용도로 쓰는 쿠보탄, 알람경보기, 후추 스프레이 등의 호신용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허씨는 “’이런게 필요없는 사회가 돼야 하는데’란 생각이 먼저 들어서 호신용품을 선물하기가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

허정기씨가 여자친구 이현정씨에게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선물한 호신용품들. 왼쪽부터 쿠보탄, 알람경보기, 후추스프레이. 이현정씨 제공

지난해 5월, 손병수(29∙가명)씨도 여느 때처럼 한밤중에 걸려온 여자친구의 임정은(26∙가명)씨의 울음 섞인 전화를 받고는 깜짝 놀랐다. 임씨는 “사건이 발생한 건물의 노래방을 이용한 적도 있고, 저도 그 화장실이 어딘지 알았어요. 당장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감과 ‘여자라서 죽었다’는 사실에 억울한 감정이 들어 남자친구에게 계속 울면서 토로하게 됐죠”라고 말했다.

강남역 10번출구 앞에서 마주한 공포와 무기력

지난해 강남역 사건 피해자 추모를 위해 당시 사건 현장을 함께 찾았던 다른 커플들도 공포와 무기력함도 함께 느꼈다고 했다. 대학생인 장다은(22∙가명)씨는 남자친구 박준수(21∙가명)씨와 강남역 10번출구 추모 현장을 찾았다가 극우사이트 일간베스트에서 나온 남성 무리와 설전을 벌였던 기억을 떠올렸다. 장씨는 “저는 초등학교 때 반에서 제일 작아서 남자애가 저를 들어서 던질 수 있을 정도였거든요. 그래도 저는 지금까지 내가 잘하면 되지, 내가 여자라서 못하는 건 없어,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강남역 현장에 나온 몸집 우락부락한 남자들을 보면서 ‘나는 신체적으로 저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무기력과 공포가 덮쳐오고 말았어요”라고 말했다.

악의를 품은 신체적 우위에 있는 남성이 여자친구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남자친구 박씨에게도 큰 무력감으로 다가왔다. “저도 어릴 때 저보다 몸집이 큰 남자애들한테 괴롭힘 당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 때문에 무술을 따로 배우기까지 했죠. 저는 여성에게 밤길 조심하라는 식으로 통제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제가 누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적일 정도로 강해졌어요”

지난해 5월18일 오후 시민들이 강남역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2. 도돌이표 같이 반복되는 싸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 이슈는 커플들 사이에 불쑥불쑥 끼어들었다. 이후 관련 사건이 이어질 때마다 이들의 논쟁은 계속됐다. “이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고, 나도 항상 느끼는 내 일이야”라는 여성들의 분노와 “네가 분노하는 건 이해하는데 왜 남자 전부를 싸잡아 욕해?”라는 남성들의 항변은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했다.

“네가 안 겪었다고 여성혐오가 왜 없는 일이 돼?” vs “남자 전부를 왜 싸잡아 욕해?”

실제 유현선(26∙가명)씨 커플은 강남역 사건 이후 6개월 가까이 만나는 주말마다 싸웠다. 유씨는 이전부터 일간베스트와 메갈리아 논쟁 등에 대해 남자친구 박현철(25∙가명)씨와 끊임없이 이야기해 왔지만 강남역 사건에서 드러난 의견차는 생각보다 컸다.

유씨는 “남자친구는 사회에 여성혐오가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더라고요. 평소에 자상하고 가정적인 친구여서 정말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기에 너무나 충격을 받았죠. 남자친구는 항상 ‘한남충’이라는 단어에 기분 나빠하면서 자기가 그런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나는 그런 그런 적 없고, 내 주변 친구들도 다 착하다’는 거에요. 저는 제가 겪은 차별, 저의 자존감을 깎아내린 예전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면서 ‘여성혐오는 없는데 내가 이상해서 이런 사람만 만난 거니? 너는 네 기분이 문제겠지만 나는 생존권이 걸린 문제다’라고까지 이야기했죠”

“시스템 만든 남자가 결국은 가해자” vs “대화 아닌 대립이 무슨 의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포스트잇을 붙이고 추모까지 함께했던 임씨와 손씨 커플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임씨는 “저는 이런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것이 남자니까 남자가 가해자고 책임이 있다고, 여자는 항상 피지배 입장이었기 때문에 대화나 화합을 먼저 이야기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항상 화를 냈어요” 라고 말했다.

손씨는 과격한 방법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강남역 사건 때문에 남자가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되는 것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이 인정하고 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대화로 해결을 해야지 남자들에게 멍에를 씌우면서까지 대립적으로 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나아가 연인 관계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손씨는 “여성이슈가 아닌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여자친구가 똑같이 흥분을 하는 사람이면 내가 이 관계를 계속해서 지탱해 나갈만한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강남역 사건으로 ‘여성혐오’란 단어를 처음 접한 남자친구에게 ‘주입식 교육’을 시키던 김민정(26ㆍ가명)씨는 남자친구 권태민(25ㆍ가명)씨에게 “왜 그렇게까지 강요를 하냐”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김씨는 “저와 다른 여성들이 겪은 차별들을 이야기를 해 줘도 여성혐오 맥락에서 이해를 못하니까 ‘모르면 외워’, ‘그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거야’라고 강하게 이야기하게 됐어요. 제가 속한 집단에서 나오는 여성혐오적 발언을 듣는 것만으로도 피곤한데 남자친구를 만나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마찰이 생기니 지치게 되더라고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주기를 맞아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한 커플. 이들은 지난 1년간 끊임없이 서로의 인식차이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3. 전환점
女 너에게만 분노를 터뜨리는 나의 모습
男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 일상 속 여성 억압

남녀 커플들의 긴 다툼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전환점을 맞았다. ‘남녀 대결론’에 거부감이 있었던 손씨는 임씨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여성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음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손씨는 “저는 예전에는 어머니가 될 성스러운 존재라는 이유로 여성이 담배를 피는 것에 부정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여자친구와 이야기를 해 보면서 ‘여자가 애 낳으려고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하고 여자친구에게도 미안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이후에도 여성을 대상화하는 인터넷의 유머 게시판의 글들에 대해서도 잘못된 점이 계속 보이게 됐고요”

임씨는 어느 순간 직장 내 ‘여혐종자’들에게는 반격하지 못하고 자신의 남자친구에게만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남자친구에게 ‘그것도 모르냐’는 등의 언어폭력을 휘두른 다음에 후회하는 일을 반복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여성혐오 이슈 자체에 대해서 화가 난 것과 남자친구가 내가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화가 난 것을 구별하지 못했더라고요”

‘82년생 김지영’속에서 발견한 어머니의 ‘당연한’ 희생

‘모르면 외워라’라는 말을 들었던 권씨는 페미니즘 서적을 읽으면서 차츰 여성혐오 문제를 실감하게 됐다. 김씨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권씨에게 추천해 줬다. ‘82년생 김지영’은 최근 권씨가 먼저 읽은 책이다. 평범한 여성의 삶 속에서 만나는 여성 억압의 순간들을 그린 이 책을 읽고 권씨는 “주인공의 어머니가 학업을 포기하고 남동생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공장에서 일했지만 당연한 희생처럼 인식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가족사에도 그런 일들을 대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며 “직장에서도 다과를 준비하는 등 여성의 역할이라고 강요돼 왔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여성혐오는 없다’는 남자친구와 갈등을 겪은 유씨는 ‘내 세계에는 여성혐오가 있고 네 세계에는 없는 거야. 네가 이걸 이해 못한다면 우리는 함께해도 함께하는 게 아니야’라고 사실상의 이별통보까지 했다. 유씨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남자친구가 집으로 돌아가다가 예전 자기 경험을 떠올려 봤다고 했어요. 어느 날 밤에 집을 가다가 자기보다 체격이 큰 남자가 취해서 비틀대며 걸어오는데,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한 느낌을 받았대요.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시야에서 멀어지니까 나왔는데 그 남자가 칼이라도 들고 있었을 것 같은 공포심이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자신은 그런 일이 살면서 한 번뿐이었는데 너는 얼마나 많이 겪었을지 생각하니까 아찔하다, 네가 말하는걸 이제 어렴풋이 알겠다고 이야기했어요”

한국일보가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를 앞두고 지난 12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차린 부스에서 시민들이 우리 사회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을 포스트잇에 자유롭게 담고 있다. 류효진 기자
“이제는 남자들 모임에서 여성혐오적 발언 공개적으로 지적”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1년을 보내면서 여성들은 이후 여성혐오 문제에 더 당당하게 맞서게 됐다고 말했다. 남성들도 “남성들 모임에서도 여성혐오 발언에 대해 보다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손씨는 “친구들끼리 있을 때 말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잘못된 거야’라고 이야기를 하게 됐다”고, 권씨는 “남자들 대화에서 은연중에 여자를 도마 위에 놓고 이야기할 때 ‘우리가 남자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라고 지적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별 위기를 겪은 박씨는 확 바뀌었다. 유씨는 “남자친구가 다른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한남충’이라는 단어, 일베나 메갈 문제도 자기가 꺼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친구들이 여자 외모 지적질을 할 때에도 ‘진지충’이라는 욕을 먹어도 핀잔을 준다고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허씨는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여성단체 후원을 시작했다. 허씨는 “저는 페이스북 등에서 여성혐오 문제에 적극적으로 댓글로 싸우는 여자친구와 달리 표현을 크게 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여성의전화와 민우회에 가입을 하고 정기 후원을 시작하면서 주변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게 된 것 같아요”

4. 강남역 살인사건 1년…오늘도 우리는 논쟁 중

이들은 아직도 여성혐오로 논쟁 중이다. 아직 서로 만족스럽지 않은 시각차도 있다. 권씨는 최근 19대 대선 투표 후 김씨에게 ’장인어른 찍을걸 그랬나’는 농담을 던졌다가 크게 혼났다. 선거 유세에 나왔다가 성희롱을 당한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후보의 딸 유담씨 사건이 논란이 된 직후였다. 김씨는 “남자친구의 ‘내가 배려한다’는 식의 시혜적 태도가 은연중에 발견될 때 화가 난다”고 말한다. 손씨는 아직 임씨가 여성혐오적 시각을 가진 남성들을 비난하는 ‘한남충’이란 단어를 말할 때마다 불편해진다.

하지만 이들은 설령 지치고 소모적이라고 느낄지라도 계속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동감했다고 말했다. 임씨는 “저도 가끔 지쳐서 ‘알았어, 더 얘기 하지 않을께’라고 하면 남자친구가 ’네가 그렇게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서 입을 다물게 되면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여성혐오 주제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계속 대화해 오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박고은PD rhdms@hankookilbo.com

한설이PD ssolly@hankookilbo.com

윤한슬 인턴기자

진은혜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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