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준비
나는 여우 같은 자식과 토끼 같은 아내와 함께 가정의 평화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아니 오늘만 살고 있는 30대 중반의 평범한 회사원이다. 어린 시절부터 빠르고 멋진 차에 열광했던 나는 현대 스쿠프 터보와 티뷰론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차’라고 감동하며 자랐고, 그 시절을 공유했던 자동차 마니아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자유로 휴게소와 유명산 구불길, 인천 북항을 천둥소리를 내며 뽐내며 돌아다녔다. 드래그에서 밀리기라도 하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으며 복수를 위해 튜닝을 거듭했다. 지금도 기억한다. 차에 붙이면 속도가 빨라진다는 마법의 스티커가 특별할인가로 5만원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버킷 시트는 따듯한 열선 시트가 됐고 이제는 속도가 아닌 연비를 위해 LPG 경차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 언덕에서 힘이라도 잃어버릴라 노심초사하며 탄력적인 발길질을 하면서 말이다. 젊은 시절보다 경제적인 여유는 생겨났지만, 밤길 산악도로를 누비던 나만의 쾌락은 가족과의 시간으로 바뀌었고 그 시절 스트리트 친구들은 이미 연락마저 두절된 지 오래다. 그래도 본능은 남았는지 주말용 가족 차라는 구실로 고배기량 스포츠 세단은 한 대 있지만 그 시절 느낌은 영 아니다.
그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똑같은 일상에 파묻혀 있을 때 회사 동료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봤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과 근사한 작품 사진에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원래 그림을 좋아하고 취미로 즐기며 주말에는 봉사활동으로 길거리 벽화도 그린다고, 그 시간만큼은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즐겁기에 계속하게 된다”는 대답을 들으니 순간 머릿속이 번쩍 하얘졌다. “나도 하고 싶은 운전이나 다시 해볼까? 그런데 요즘은 어떻게 하지?”
처음에는 그저 혼자 탈만한 차를 구하려고 아내에게 동의를 구했을 뿐이다. 처음에는 ‘절대 불가’라고 외치던 그녀를 어르고 달래고 설득해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모순(?)적인 조건이 딸려왔지만 그래도 좋다.
1. 안전한 곳에서만 탈 것.
2. 차를 탈 때는 가족과 함께!
3. 저렴한 차에 유지비도 그러할 것.
생각해보니 하지 말라는 얘기 같지만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인터넷을 뒤지니 눈에 번쩍 띄는 정보를 발견했다.
“오! 드디어 찾았다. 100만원 짜리 중고차로 레이스를 즐기는 방법을!” 한국일보 기사에는 ‘언더백’ 레이스라는 희한한 경주가 소개되어 있었다. 무조건 생산된 지 10년이 넘었거나, 현재 시세 100만원 이하의 자동차 오너만 참가할 수 있는 경주란다. 인터뷰 내용과 사진을 보니 30~50대 아저씨들이 추억을 휘날리며 서킷에서 올드카를 학대(?)하고 있었다. 구형 아반떼를 시작으로 브로엄, 티뷰론, 엑센트, 베르나, 클릭, 투스카니, 그리고 1988년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 시절 엑셀까지 보무도 당당하다.
사진을 보는 순간 옛 기억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깊고 외로웠던 논두렁 추락 사건 같은 에피소드 말이다. 추억이 덕지덕지 붙은 옛 애마도 떠오른다. 강변북로 가드레일이 얼마나 단단한지 알려줬던 티뷰론, 아내와 사귀던 시절 데이트 도중 불쑥 심야버스를 타고 통영에 내려가 피시방에서 계약서 쓰고 끌고 온 엑센트 TGR, 원메이크 경주의 창시자 클릭까지…
“음!” 갑자기 머리가 막 돌아간다. 나는 앞으로 주말에 ‘가족과 함께’ 공기 좋고 경치 뛰어난 강원도로 여행을 가는 거다. 출시된 지 15년에 불과한 5만Km 달린 ‘저렴한 경주차’에 롤 케이지와 4점식 벨트로 무장한 채 ‘안전한 서킷’에서 다시 예전처럼 화끈하게 달릴 것이다.
서킷 달릴 경주차 구하기
‘언더백’ 경주차를 구하기로 다짐하고는 몇 가지 기준을 세웠다.
1. 배기량 2ℓ 미만의 수동변속기가 달린 자동차.
2. 사고 유무를 떠나 차체가 튼튼하고 부식 없는 자동차.
3. 구입비와 등록 및 보험 등 모든 비용에 300만원 이하인 자동차.
유력한 차종과 거래 금액을 확인하고자 중고차 사이트를 들락거렸다. 클럽 투스카니, 이주넷, 투티터, 하이튜닝, SCF, 스사사, 명가재건, 클럽 엑센트, NXD 등 추억 속 동호회에도 모두 접속해봤다. 아예 없어진 동호회나 유령이 나올법한 동호회, 아직 명맥은 유지하는 동호회를 보니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이 꼭 식어버린 자동차에 대한 내 열정과 같은 느낌이었다. 몇몇 매물을 비교하니 대부분 오래된 중고차라 딜러나 개인의 가격 차이도 50만 원 이내에 불과했다.
고민을 하다 차종은 투스카니로 정했다. 세 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했으며 비교적 상태가 좋은 매물이 많았으니까. 나는 여태까지 투스카니만 9대를 소유했기에 익숙한 면도 있었다. 2.7ℓ 델타 엔진에 6단 아이신 변속기가 맞물린 엘리사와 2ℓ 베타 엔진을 쓴 기본형 모델을 고민하다가 부품 구하기가 쉽고 가격도 저렴한 2ℓ 엔진을 골랐다. 현실에서는 폐차 직전의 고물상에나 보낼 법한 30만원 짜리 매물도 있었고, 2002~2005년까지의 순정 상태를 유지한 차는 100만원 대 중반 정도의 시세에 거래되고 있었다.
다음 차례는 예상 정비비용이다. 오래된 차를 서킷에서 탈 수 있도록 꼭 해야 할 정비 리스트와 구매 내역을 정리해봤다.
손에 넣을 차의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든 걸 손본다면 카센터 기준으로 120~150만원 정도가 예상됐다. 어차피 정비이력을 따질 수 없는 오래된 자동차라 모든 걸 교체할 생각으로 100만원 초반에 안팎이 멀쩡한 자동차를 열심히 찾았다. 그러다가 동호회 카페에 올라온 차를 봤는데 부식이 없는 차체에 소모품은 대부분 교체됐고, 서킷 주행을 위한 세팅이 완료된 그런 차였다.
다만 아주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엔진이 망가져서 수리를 해야 한다는 조건. 150만원에 올려둔 판매자와 통화한 뒤 주말에 시간을 내어 차가 보관된 경기도 남양주를 찾았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구석에 서 있었지만 차주가 신경을 쓴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고, 엔진만 고치면 다시 잘 달릴 수 있는 차였다. 게다가 엔진은 대한민국 튜닝숍이면 창고에 한두 개쯤은 모두 보관하고 있는 베타 엔진, 그 중에서도 마지막 개량형 유닛을 쓴 차종이다. 인터넷 중고품 사이트에서 깨끗한 엔진을 배송료 포함 45만원에 구했다. 기존 엔진에 장착된 신품급 부품(발전기, 각종 센서, 점화 플러그, 케이블, 각종 벨트)를 새로운 엔진에 이식해 장착하고 각종 오일을 전부 교체하는데 쓴 비용은 60만원. 엔진과 냉각 라인을 2회씩 플러싱한 건 기본이다.
들뜬 마음으로 차를 몰고 집에 오는 길, “헉”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온다. 고회전에서 변속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 ‘역시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다.’ 수소문 끝에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수동 변속기 전문업체를 파주에서 찾아냈다. 재생한 변속기를 확인한 뒤 방문해 순정품을 써서 서킷 전용으로 세팅(라비타 종감속 기어(4.294)와 베르나 5단 기어(0.78) 조합)했다. 이렇게만 작업해도 서킷에서 가속이 빨라지고 고속도로에서 연비 운전이 가능하다. 클러치 디스크는 동판 상태가 90% 수준이라 그냥 재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예상치 못했던 재생 변속기 장착과 종감속/기어비 튜닝에 45만원을 지출한 셈이다.
지금까지 들어간 모든 비용을 정리해본다. 자동차 순수 구입비가 150만원, 등록비가 15만원, 그 외 정비비용이 150만원이었다. 도합 315만원이며 1년치 보험료는 40만원(자차 포함).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해 예상보다 50만원 정도 늘어났지만 만족한다. 이제 경주차는 준비됐다. (2편에서 계속)
글 함승완 편집 최민관 edito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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