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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언론이 만들어 낸 ‘투혼’ 프레임...땅을 치는 선수들

입력
2017.04.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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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범의 몸은 만신창이였다’(경향신문)

‘나보다 땀 많이 흘렸으면 金 가져가, 김현우’(국민일보)

‘여민지는 오른 무릎 십자인대 부상 탓에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지만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한국일보)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큰 규모의 국제 대회가 열릴 때면 흔히 볼 수 있는 기사 제목과 내용들이다.

2002년 한ㆍ일월드컵이 끝난 지 15년이 지났지만 코뼈가 부러진 김태영(47ㆍ수원 삼성 코치)이 특수마스크를 착용한 채 운동장을 누비는 장면은 생생하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그라운드로 들어가야 하니 빨리 붕대를 감아달라고 의무진에게 소리치는 이임생(46ㆍ톈진 2군 감독)은 ‘투혼의 상징’으로 각인돼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 유도 81kg 이하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낸 김재범. 온 몸이 부상이었던 그의 투혼이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런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 유도 81kg 이하급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낸 김재범. 온 몸이 부상이었던 그의 투혼이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런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02년 한ㆍ일월드컵 미국전에서 부상 당해 머리에 피를 흘리는 황선홍(오른쪽).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2년 한ㆍ일월드컵 미국전에서 부상 당해 머리에 피를 흘리는 황선홍(오른쪽). 한국일보 자료사진

선수들이 극한의 정신력으로 부상을 이겨내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심금을 울리는 스토리는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는 소위 ‘킬러 콘텐츠’라 취재진이 욕심 내는 아이템이기도 하다. 선수들도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서곤 한다.

문제는 부상 투혼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경우다.

2012년 한국스포츠학회지에 실린 ‘한국 스포츠의 부상 투혼 담론에 대한 미디어 프레이밍 고찰 : 17세 이하(U-17) 여자월드컵 보도 사례’에서는 언론이 선수의 부상을 투혼이라는 긍정적 어휘로 표현해 이를 긍정적 담론의 형태로 이끌어왔다고 지적한다.

이 논문은 2010년 9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열린 U-17 여자월드컵을 대표 사례로 삼았다. 당시 한국은 U-17 등록 선수(345명)가 일본(2만5,000명)의 1.4% 밖에 안 되는 척박한 환경에서 주전 선수들의 크고 작은 부상에도 정상에 올라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여민지(왼쪽)와 김혜리가 2010년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U-17) 여자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뒤 우승 트로피와 골든볼(MVP), 골든슈(득점왕)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민지(왼쪽)와 김혜리가 2010년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U-17) 여자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뒤 우승 트로피와 골든볼(MVP), 골든슈(득점왕)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축구가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대회에서 우승한 건 처음이었다. 특히 대표팀 에이스 여민지(24ㆍ스포츠토토)는 대회 개막을 두 달 앞두고 오른쪽 무릎 십자 인대를 다쳐 참가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지만 역경을 딛고 일어나 우승과 최우수선수(MVP), 득점왕을 모두 거머쥐며 일약 ‘국민 스타’ 반열에 올랐다.

논문은 당시 경향신문, 국민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 아시아투데이, 한겨레신문, 한국일보(이상 가나다순)에서 표본 기사를 수집했다. 한국 선수의 부상을 언급한 80개의 문장 중 부상에 대한 단순 사실보도 34개(42.5%)를 제외한 46개(57.5%)가 ‘부상투혼 구축 프레이밍’과 ‘부상 투혼 미화 프레이밍’의 범주 내에 있었다. ‘부상 투혼 구축 프레이밍’은 부상 출전에 대한 비판 없는 보도다.

U-17 월드컵을 앞두고 여민지가 당한 무릎 십자 인대 부상은 통상 반년 이상의 재활 기간이 필요하다. 여민지는 대회 2년 전인 2008년, 중 3때 이미 같은 부위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여민지의 활약과 재기 가능성에만 집중할 뿐 과거 부상 전력과 어떤 고통이 따르는 지 등의 문제제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미디어 수용자에게 ‘부상=출전 가능’이라는 등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외눈박이’ 보도였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런 보도를 통해 부상이나 정상 컨디션이 아니어도 결과를 위해서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을 공산이 크다. 또 다른 2차 부상의 위험도 더욱 커진다.

여민지 등 U-17 대표팀 선수단은 청와대에 초청받을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여민지가 당시 이명박 대통령 영부인 김윤옥 여사에게 유니폼을 전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민지 등 U-17 대표팀 선수단은 청와대에 초청받을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여민지가 당시 이명박 대통령 영부인 김윤옥 여사에게 유니폼을 전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U-17 월드컵 때 한국이 결승에서 일본을 누르고 우승하면서 부상 투혼 관련 기사가 크게 증가했다. “대회 기간 내내 부상 선수가 많아 고민이 많았는데 불굴의 정신력을 보여준 선수들에게 감사하다”(한국일보)는 최덕주 감독의 인터뷰나 ”의사가 저렇게 지독한 애는 처음 본다고 말하더라”(경향신문)는 여민지 어머니 임수영 씨의 인터뷰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민족주의가 강하게 투영되는 국가 대결의 장이라 부상 투혼이 더 아름답게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여민지는 2010년 U-17 월드컵이 끝나고 1년 뒤에 오른쪽 십자 인대를 또 다쳐 재건 수술을 받았다. 이 부위만 세 번째 부상이다. 4년 뒤인 2015년에는 왼쪽 무릎 십자 인대가 파열되는 바람에 캐나다 여자월드컵 진출이 좌절됐다. 한 때 한국 여자축구의 미래를 책임질 재목으로 평가 받았던 여민지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한 원인이 뭔지 한 번쯤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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