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를 내고 언론 인터뷰를 하면서 젊은 세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고민하는가. 나는 몇 번은 이런저런 추측을 늘어놓았고, 한두 번은 ‘내가 아니라 당사자들에게 직접 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젊은 세대보다 오히려 나의 세대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하게 됐다. 1970년대 중반쯤 태어나 한때 ‘X 세대’라고 불렸고, 이제 40대가 되었거나 곧 되는 우리들. 우리는 스물에서 서른 사이에 무엇을 원했고 무엇을 고민했던가. 그리고…… 무엇을 했나.

건국 이래 우리 앞까지 모든 세대가, 공이 과를 훌쩍 넘는다. 나의 조부모 세대는 헌법과 정부와 학교를 만들고 자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허허벌판에 공장을 세웠고 달러를 벌었고 보릿고개를 없앴다. 나의 삼촌ㆍ이모와 사촌형ㆍ누나들 덕분에 오늘 내가 어디 음침한 방에 끌려가 알몸으로 두들겨 맞을 걱정 없이 술자리에서 실컷 정치를 논한다. 앞선 세대가 중진국 진입과 대통령 직선제를 간절히 원하고 거기에 이르는 길을 깊이 고민한 덕분이다. 대개 해법은 피가 나도록 맨몸으로 부딪히는 것이었다.

X 세대는 무엇을 원했던가. 우리는 촌스럽고 엄숙한 것이 지독히 싫었고, 세련됨과 자유로움을 열렬히 추구했다. 우리는 어떤 변화의 중심에 섰고, 그 결과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

그러나 그 성취는 반쪽 짜리였다. 무대 위에서는 십대 소녀들이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옷을 입고 골반을 흔들며 유혹을 노래하지만, 무대 아래 한국 사회는 여전히 촌스럽고 엄숙하다. ‘청소년도 성관계를 가질 자유가 있다’는 말에 화들짝 놀란다. 십대들에게 어떻게 피임을 가르쳐야 할지 몰라 그냥 침묵한다.

우리의 고민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우리의 에너지는 주로 우리 세대의 욕망을 해결하는 데 쓰였다. 자유와 해방의 물결은 우리가 관심을 가진 영역에서만 좁게 일었다. 사회 진보를 고민한 친구들은 선배들의 구호를 답습했다. 학생운동이 몰락한 과정은 자멸에 가까웠다.

요즘 젊은이들이 변혁의 투지를 소녀시대의 노래로 표현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가? 나는 좀 다른 의견이다. 수십 년간 공동체 발전의 한 축이었던 훌륭한 전통이 1990년대 중후반에 무관심과 게으름으로 업데이트되지 않아 헐리고 무너진 광경을 본다. 가장 무관심했던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한다.

게으름에 대해 말하자면, ‘김영삼 정권 타도’ 따위의 구호가 게으름이었다. 우리가 양성평등 같은 어젠다를 보다 깊고 무겁게 제기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금 젊은이들이 남혐 여혐 군대 출산 어쩌고보다는 나은 논의를 펼치고 있지 않을까. 우리가 생활 현장의 민주화를 더 강하게 요구하고 실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넌더리 나는 야근과 회식문화는 진즉 사라지지 않았을까.

물론 외환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내 기억에 X 세대가 생존을 걱정했던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몇 년 정도였다. 이후에는 생존보다는 이익을 위해 싸웠다. 원어민 선생님이 있는 영어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기 위해 허덕이는 내 또래 부모들을 보면서 그렇게 느낀다. ‘영어 유치원에 다니지 못하면 아이 인생이 끝장’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부모들도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아이가 누릴지 모를 약간의 이익을 포기하기 싫어서, 또는 남들도 하니까, 정도의 이유인 것 아닌가.

이것이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개개인의 책임을 따져 물을 일도 아닐 게다. 우리만 잘못한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전체적으로는, 부모와 선배들이 닦은 길을 잘 관리하면서 꽤 넓혔다고 평가한다.

다만 새로운 길을 충분히 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헤매는 데는, 20년 전 젊은이들의 고민이 부족했던 탓이 크지 않은가. 각 세대가 앞 세대로부터 무엇을 물려받고 다음 세대에 무엇을 물려주었는지를 따져보면, 우리의 성적표가 가장 초라하지 않을까.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지금 한국에서 그나마 여유와 역량이 있는 세대를 찾으라면 그것도 우리다.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그 답부터 찾아야 한다. 미국도 일본도 네덜란드도 덴마크도 정답은 아니다. 한국에는 없는 심각한 문제가 있거나, 또는 한국과 여건이 너무 다르다.

책을 읽으며 생각을 가다듬는 동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불필요한 야근을 없애고, 법으로 정해진 휴가는 다 누릴 수 있는 조직 분위기를 만드는 작업은 어떤가. 사장이 아무리 “일찍 퇴근해라, 휴가 써라”고 해봤자 사원들은 따르지 않는다.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장이 아무 말 없더라도 부장·차장이 솔선수범하면 그 파급력은 놀랍다. 부하 직원들이 ‘이 선까지는 괜찮나 보다’고 여긴다.

윗사람에게 찍힌다거나 하는 위험이 따를 수는 있겠는데…… 그 정도는 감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부모와 선배들이 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그 위험이 정말 생존과 관련된 문제인가? 오히려 업무 성과는 더 높아질지도 모른다.

장강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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