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브룬힐데 폼젤

브룬힐데 폼젤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범이라 할 만한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의 비서로 만 3년을 일했고, 독일이 패망하고 72년을 더 살았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저 3년이 던지는 세상과 자기 내면의 질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과연 그가 그 질문에 정직하고 치열하게 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대답은 우리 자신의 삶의 거울을 통해서만, 각자가 간신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블랙박스& 미디어 필름 화상.

독일 제3제국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는 흔히 ‘나치의 브레인’이라 불린다. 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선전부장으로 1933년 나치 집권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제국 선전장관을 맡아 독일 국민의 광적인 민족주의와 유대인 탄압, 전시 동원 및 정치 선전의 전략ㆍ전술을 총괄 기획하고 실행했다. 키 165㎝의 작고 왜소한 체구, 골수염 후유증으로 생긴 장애 등 청년기까지 이어진 열등감을, 그는 파시즘을 통해 배설했다. 히틀러가 없었다면 괴벨스가 없었겠지만, 괴벨스가 없었으면 히틀러도 히틀러 같지 않았으리란 말은, 그의 현란한 머리와 혀가 히틀러보다 더 히틀러스러웠다는 의미였다. 베를린 총통관저 지하 대피호에서 히틀러가 자살한 다음 날인 45년 5월 1일, 그는 히틀러를 기려 이름 첫 글자를 모두 H로 단 6남매를 먼저 독살한 뒤 아내 마그다와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자살은 단지 전쟁에 져서 심판을 받아야 할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그다가 아이들의 입에 청산가리를 털어 넣으며 했다는 말- “총통 각하 없는 세상 따위 살 가치가 없다”-처럼 그도 더 살 가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제3제국의 심장과 브레인이 차례로 멎어가던 1945년 봄 그 최후의 순간, 그 지하 관저에 괴벨스의 비서 브룬힐데 폼젤(Brunhilde Pomsel)이 있었다. 폼젤은 1942년 ‘어쩌다 보니’ 괴벨스의 비서가 됐고, 장관실 다른 비서 5명과 더불어 괴벨스의 말과 글을 타이핑하고, 문서를 정리하면서 만 3년을 일했다. 패전 후 소련군에게 전범으로 체포돼 5년 형을 살고 출소한 뒤 독신으로 지내며 71년 은퇴할 때까지 비서로 성공했고, 일을 놓은 뒤로도 비교적 풍족하게 36년을 더 살았다. 하지만 그는, 독일 패망부터 쳐서 햇수로 72년에 이르는 그 긴 세월 동안, 괴벨스를 도왔던 3년의 시간이 던지는 안팎의 질문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제3제국 패망의 마지막 증인’ 브룬힐데 폼젤이 1월 27일 별세했다. 향년 106세.

폼젤은 1911년 1월 11일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장공이었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그들은 성미에 거슬리면 아이들에게 매질도 서슴지 않던 엄격한 부모였다. 훗날 폼젤은 유년 시절 ‘의무와 복종’을 중시하는 프로이센 특유의 훈육에서 나치 브레인의 비서로 일한 이력의 뿌리를 찾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가 1차 대전 징집영장을 받던 일을 생애의 첫 기억이라고 말했다.(텔레그래프, 2017.1.30) 다음 기억들은 아마도, 1차 대전 패전과 막대한 전쟁배상금에 허덕이던 베르사유조약 체제의 바이마르공화국, 참호에서 돌아온 부상당한 베테랑들의 절망, 복수심에 불타는 과격한 민족주의의 너울 위에서 일렁댔을 것이다.

그는 26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 유대인 의류공장의 견습사원으로 취직했고, 몇 년 뒤에는 보험관련 업무를 주로 맡던 한 유대인 변호사 사무보조원으로 일했다. “1933년 1월 30일(히틀러 수상 취임일)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 히틀러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는 말을 그(유대인 변호사)에게는 차마 할 수 없었다”(텔레그래프, 위 기사)고 폼젤은 말했다. 그 무렵 이미 유대인 변호사의 일감은 표나게 줄어들고 있었고, 폼젤은 친나치 성향의 극우 작가 울프 블레이(Wulf Bley)라는 이의 타이피스트 일을 몰래 겸업했다. 그는 빼어난 타이피스트였다. 폼젤이 나치당에 입당한 시점은 33년이라는 설도 있고, 42년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30년대 이미 그는 히틀러와 나치당 지지자였다. 다만 훗날 거듭한 자기 변호처럼, 그는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열성적 지지자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는 제3제국 국영방송사 뉴스파트 타이피스트를 거쳐 42년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실 비서가 됐다. 그 ‘출세’를 그는 “내가 무슨 전염병을 앓지 않는 한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상의 명령이었다”(가디언, 16.8.15))고 말했다. 하지만 월 275마르크의 당시로선 후한 급여와 면세 수당, 고위직 관료들과 멋진 옷차림의 여성들, 궁전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을 행운으로 즐긴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방송국 타이피스트 가운데 가장 손이 빠르다는 걸 인정받은 거여서, 나는 얼마간 우쭐해 하기도 했다.”

조세프 괴벨스의 비서로 일하던 30대 초반의 브룬힐데 폼젤. 블랙박스 앤 미디어 필름.

그가 선전부에서 일한 막바지 3년은 전쟁과 나치의 광기가 폭발하던 때였다. 그는 “괴벨스의 문건을 시키는 대로 타이핑한 잘못밖에 없다”고 했지만, 그 문서들 중에는 그가 드물게 기억난다고 말한 백장미단의 조피 숄(Sophie Scholl)에 대한 문건도 있었다. “괴벨스의 특별보좌관은 그 문건을 금고에 보관하라며 절대 들춰보지 말라고 지시했다. 나는 내가 신뢰받는 존재가 된 듯해 뿌듯해하며 끝내 읽지 않았다.”(NYT, 17.1.30) 그가 무심코 타이핑한 문건들 중에는 부헨발트나 아우슈비츠로 발송된 섬뜩한 지시공문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출옥 후에야 ‘유대인 문제’의 실체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부헨발트에 유대인이 있다는 건 알았다. 우린 그게 교정시설인줄 알았다.(…) 유대인들이 강제 추방당하는 것도 보곤 했다. 당국은 그들이 동유럽에 재배치되는 거라고, 현지인들이 전쟁으로 피난 가는 바람에 방치된 농토를 개간해서 농사를 짓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우린 그렇게 믿었다.”(NYT,16.7.5) 그는 “만일 나를 탓하려거든 히틀러에게 권력을 준 독일 국민 모두를 탓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리베라시옹, 17.1.30) “전사한 독일군 숫자를 줄이거나 소련군에게 강간 당한 독일 여성 숫자를 부풀리는 등의 통계 조작”(USA투데이, 15.4.22)도 물론 “지시를 성실히 이행한 것일 뿐”이었다.

괴벨스의 관저 저녁 만찬에 초대받은 일, 미군 공습으로 집이 파괴되는 바람에 입을 옷이 마땅치 않던 그에게 마그다가 자신의 고급 드레스를 선물한 일…, 43년 2월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패 직후 사기 진작과 총력전 태세를 정비하기 위해 괴벨스가 나선 베를린 체육궁전(Sportpalast) 대중 연설 땐 마그다 등과 함께 연단 지척에서 그 장면을 보기도 했다. 괴벨스에 대한 폼젤의 인상은 이중적이었다. “그는 쉽사리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사적인 질문을 한 적이 없었고, 아마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면서도, 한편으론 “그는 부성적 친근감을 지닌 유쾌한 상관이었다”고도 말했다.(인디펜던트, 2011.9.2) 괴벨스 자체가 이중적이었다. 그는 차갑고 이성적이면서도, 숱한 염문에서 엿보이듯 언제든 끓어 넘칠 수 있는 뜨거운 피도 함께 지닌 자였다. 그날의 선동 연설이 그러했다. “그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 순식간에 절규하며 고함을 지르며 변신하던 장면은 어떤 배우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고 폼젤은 말했다. “사무실에서 그는 고상하고 우아한 사람이었다. 그 연단에서는 성난 난쟁이(raging midget)같았다. 그 엄청난 대조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가디언, 2016.8.15)

히틀러와 괴벨스 일가. 뒷줄 왼쪽부터 마그다 괴벨스, 히틀러, 조세프 괴벨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자살했고, 괴벨스 부부는 하루 뒤 자녀들을 독살한 뒤 자살했다. 자료사진

45년 5월 1일, 마그다는 SS친위대 치과의사 헬무트 쿤츠(Helmut Kunz)에게 장녀 헬가(Helga, 당시 12세)부터 막내 하이데(Heide, 5세)까지 5녀 1남에게 모르핀 주사를 놓게 했다. 괴벨스 못지않게 열렬히 히틀러를 추종했고, 괴벨스보다 더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다고 알려진 마그다였다. 청산가리(cyanide) 캡슐을 들고 잠든 아이들 곁에 온 마그다는, 알려진 것과 달리, 망설임 끝에 울면서 쿤츠에게 도움을 청했고, 쿤츠가 거부하자 하인리히 힘러의 주치의인 루드비히 슈툼페거(Ludwig Stumfegger)가 나섰다고 2009년 텔레그래프는 전했다.(위 기사) 아버지 사무실에 자주 놀러 오곤 하던 아이들을 폼젤은 사랑했다고 한다. 훗날 그는 “나는 괴벨스를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세상에 가한 행위 때문에, 또 그의 천진무구한 아이들을 살해한 사실 때문에”라고 말했다.(가디언, 2017 위 기사)

50년 출소한 그는 한 방송사 비서로 취업, 비서실장까지 승진하며 꽤 풍족한 급여와 특권을 누리다 71년 은퇴했다. 그는 뮌헨 슈바빙 거리의 자택에서 독신으로 지내며 인터뷰 일체를 마다하곤 했다.

폼젤이 세상에 나선 것은 2011년 오스트리아의 다큐멘터리 제작자 크리스티안 크뢰네스(Christian Kroenes)팀의 다큐멘터리 ‘A German Life’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약간 두렵긴 하지만,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제작진의 제안에 공감했다”고 그는 말했다. “언론과 작가 등 수많은 이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그 시대를 이야기했다. 이제 내 차례가 된 셈이다.”(NYT,16.5 위 기사) 그의 회고담 사이사이 기록영상과 자료 등을 편집한 2시간짜리 다큐는 2016년 뮌헨 필름페스티벌에서 발표됐다. 화면 속 100세의 그는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을 천진하게 토로했고, 조피 숄 처형 에피소드를 설명하면서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들이 (나치정권에 저항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더라면 지금 살아 있었을텐데…”라고도 말했다.(리베라시옹, 위 기사) 그는 자신의 삶에 후회 없다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당시 우리가 나치에 저항했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들조차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당시엔 온 나라가 마법에 빠진 듯했다. 우리 모두가 사실상 거대한 강제수용소에 있던 셈이었다.”(가디언, 16.8. 15) 그가 느낀 조금의 가책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단견”에서 비롯되는 거였다.(NYT, 16.5기사)

다큐 감독 중 한 명인 플로리안 바이겐자머(Florian Weigensamer)는 “폼젤의 말은 믿을 만하다. 그는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 참회 뒤에 숨는 이들과 달랐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에 진실했다. 다만 자신의 운명만 보았을 뿐, 자신을 사회적 차원 혹은 역사적 맥락 안에 놓아볼 줄 몰랐다”고 말했다.(가디언, 17.1.30)

폼젤이 괴벨스의 비서가 되기 직전까지 연애하며 함께 독일을 탈출하려고 했다던 유대인 청년 이야기, 또 42년 무렵 연락이 끊긴 한 유대인 친구의 소식을 2005년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개관된 뒤에야 수소문해 45년 아우슈비츠에서 숨진 사실을 알고 크게 낙담했다는 이야기도 아마 모두 진실일 것이다.

앞서 썼듯이 폼젤은 괴벨스를 도운 3년의 이력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과연 그가 그 질문에 성실하게 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대개의 인간은 선택 이전에 치열하게 생각하고, 이후의 질문들에는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찾는 데 혈안이 된다. 그것은 질문의 회피다. 모든 질문에 이미 답을 찾아버린 이들, 그래서 더 이상 어떤 질문에도 긴장하지 않는 이들은, 남은 생이 편할지 모르지만, 질문에 응할 의지도 능력도 잃어버린 이들이다. 폼젤의 삶에 대한 평가도, 그런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A German Life’를 두고 한 비평가(Charly Wilder)는 다큐가 폼젤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 국제정치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있다. 다큐 감독들은 (불의의)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에 대한 인간의 판단 능력과 의지를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다”고 썼다.(스미소니언, 17.1.30)

물론 그 질문이 선거처럼 정치적 선택의 문제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질문에 거하는 삶을 ‘초월’하면서 우리는 점점 같잖은 어른이 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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