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앞집이 이사를 갔다. 이웃이 이사 가서, 마음이 헛헛해지기는 처음이었다. 이웃사촌처럼 오순도순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두꺼운 철문을 뚫고 들어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참 좋았는데 말이다.

앞집에는 다섯 살, 일곱 살 형제와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개구쟁이 형제는 엘리베이터에서 앞집 아줌마를 만날 때마다 뭔가 자랑할 거리를 찾느라 분주했다. 새로 손에 넣은 터닝메카드를 보여주는 동생도, 색이 바뀐 태권도 띠를 가리키는 형도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아이들이 눈을 반짝일 때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을 만난 눈빛으로 화답하곤 했다.

아침 7시 출근 시간 엘리베이터 앞에서는 아이들 아빠와 마주치곤 했다. 매서운 바람을 뚫고 일터로 나가는 가장의 모습. 17층부터 1층까지 내려가는 사이, 젊은 가장은 형제들이 내는 우렁찬 소리를 미안해했다. “아니에요. 아이들 노는 소리 듣는 게 좋아요”라고 답했지만, 그냥 하는 말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앞집 아이들 엄마는 ‘발명왕’이다. 이름도 안다. 예선 씨. 의욕도 힘도 넘치는 아들 둘 건사하느라 바쁠 텐데, 그 와중에 생활용품을 발명해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분리수거 핸드캐리어 ‘오니해’다. 이름도 생활밀착형으로, 오니해는 ‘오늘은 니가 해’의 줄임말이다.

미국으로 출장을 떠나면서, 신문이 문 앞에 쌓일 것이 걱정됐다. 어찌된 영문인지, 출장에서 돌아온 날 집 앞에는 아침 신문만 얌전히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알고 보니, 앞집에 사는 예선 씨가 빈집으로 보일까 봐 일부러 신문을 챙겨 놓은 것이었다.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잔잔한 감동은 일상에 기름칠을 해주곤 했다. 앞집이 이사 가던 날. 도톰한 아이들 겨울 양말을 들고 앞집 문을 두드렸다. 고마웠다며, 이삿짐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예선 씨를 꼬옥 안아줬다.

삶의 공간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도 이웃은 중요하다. 옆방에 사는 이가 누구인지, 함께 묵는 이가 어떤 이인지에 따라 여행의 질이 달라진다. 페루 리마에 있을 때였다. 정원이 넓은 게스트하우스였는데, 매일 아침 마주치는 이탈리아 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마르코.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려 마시는 그와 커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어느 날 이야기 주제가 와인으로 흘러갔다. 와인 이야기가 나오자 벌떡 일어나 큰 종이를 가져오더니, 이탈리아 와인의 계보부터 품종, 트렌드까지 끝없이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그날로 나에게 와인이라는 신세계가 펼쳐졌다.

잊지 못할 여행이웃 중 하나는 파키스탄 훈자에서 옆방에 묵었던 루나네 가족이다. 곰돌이 인형을 들고 있던 루나는 이제 갓 세 살을 넘긴 꼬마아가씨였다. 훈자는 풍경도 사람도 아름다운 곳이지만, 어른도 가기 쉽지 않은 지역인데 세 살배기 아이를 데려오다니, 루나 엄마아빠가 보통 여행자는 아닌 게 분명했다.

훈자 숙소에서 보이는 풍경. 루나 엄마가 루나를 안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훈자에서 화창한 날을 보내던 어느 날. 심사숙고해서 골라 온 소니 카메라가 멈춰버렸다. 사진이 여행의 목적은 아니었지만, 기록 중독자에게는 더없이 난감한 상황이었다. 훈자는 오지중의 오지. 카메라를 새로 구입하기도 힘들었다.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20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와야 하는 곳이었다. 울상이 된 내 앞에, 루나 아빠가 말없이 묵직한 카메라 한 대를 내밀었다. “누나, 제가 카메라 잃어버려봐서 알아요. 괜찮으시면 빌려드릴게요. 이웃이잖아요.”

루나네 가족과 만난 지 단 사흘 만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믿고 빌려주겠다는 루나 아빠가 놀라웠다. 선뜻 받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사진을 찍으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평생 은혜를 갚겠다며 카메라를 받아 들었고, 카메라로 인한 인연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족 모두 역마살을 안고 태어난 루나네 가족은 삼 년 전 거제에 살다가 남해를 거쳐 제주에 정착했다. 지난달 엄마와 함께 제주를 여행하며, 루나네 가족들을 소개해드렸다. 서로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더 없이 뿌듯했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치는 이웃은 가족과 다름없고, 그런 이웃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채지형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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