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가면, 아이들이 나올 때까지 엄마들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나를 포함해 몇 안 되는 아빠들은 멀찍이 서로 거리를 유지한 채 혼자서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다. 그건 그 시간 그 곳에서 스마트폰에 열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스마트폰 말고 ‘뻘쭘함’을 견딜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다들 그러고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도 그런 이유로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척’했다. 다른 아이 엄마들이 ‘절대로’ 내게 말도 붙이지 못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연기를 해왔다. 물론, 아이를 데리러 온 아빠가 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아빠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면 뻘쭘함을 견디기 훨씬 더 쉬웠겠지만 그 아빠 역시 뭔가에 집중하고, 아니 집중하고 있는 듯 보여서 다가가기 힘들었다. 분명 그 아빠도 연기 중이었겠지만 말이다.

놀이터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놀이터에 들어서면 언제나 아이와 같은 반인 아이들의 엄마들이 벤치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이가 미끄럼틀로 달려가면, 나는 엄마들이 모여 있는 벤치의 반대 편, 그늘 하나 없는 벤치에 앉아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요즘엔 아예 책을 들고 가서 밀린 독서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모여 있는 엄마들 사이에 끼거나 다른 아빠에게 다가가 말을 붙이기 힘들다. 그건 분명 서슴없이 누군가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내 성격 때문이겠지만, 그보다 그런 자리에서 당연하게 따라오는 예상 질문들을 피하고 싶었던 탓이 더 컸다. “무슨 일을 하시길래 늘 아이를 데리러 오세요?” “엄마는 많이 바쁘신가 봐요?” 있는 그대로 대답하면 그 뿐이겠지만 그런 질문에 이런저런 대답까지 하면서 엄마들 모임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 모르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게오르그 짐멜은 부끄러움이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해 부각된 현실의 자아가 자신의 이상적인 자아와 일치하지 않을 때 생긴다고 한다. 현실의 나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나 사이에 있는 간극을 누군가가 바라보게 되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내가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가면서 느낀 뻘쭘함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현실의 나는 ‘육아하는 아빠’이지만 엄마들과 아이를 기다리며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나는 ‘직장에서 일하는 아빠’였던 것이다. 나는 거기에 있는 많은 엄마들 사이에서 ‘일하러 가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보는 아빠’로 나 자신이 부각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며칠 전이었다. 동네 카페에 앉아 일을 하다가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내 앞 테이블에 앉아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남자들은 한 테이블에 둘러 앉아 야구 유니폼 제작에 대해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사회인 야구단 모임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하던 일로 돌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아저씨들이 모두 옆 동네 유치원의 학부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 인연으로 야구단을 만들어 매주 함께 야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형 아우로 불렀고 맥주 한 병 없이 직장과 아이들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옆 동네 유치원 아빠들을 보면서, 모르긴 몰라도 아마 저 아빠들은 아이를 픽업하러 가서 애먼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지는 않을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분명 아는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김금희가 쓴 소설 ‘체스의 모든 것’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거기에서 소설가는 이기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상태로 그것을 넘어서는 사람이라고 썼는데, 나는 아빠 야구단을 보며 부끄러움은 ‘함께 해야’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제였다. 유치원 마치고 들르는 놀이터에서 내 옆 벤치에 할머니 한 분이 앉으셨다. 아이와 같은 반에 있는 손자를 매일 픽업하러 오시는 할머니셨다. 힐끗 보고 눈인사를 드리고, 다시 책을 보는 척하다가 처음으로 할머니가 계신 벤치로 자리를 옮겨 아이들을 함께 기다렸다. 함께 부끄러움을 이겨보려고 말이다.

권영민 철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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