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펠릭스 브로더

수학 비선형함수분석 분야의 석학 펠릭스 브로더는 20세기의 이념과 특별한 가족사에 끊임없이 휘둘렸지만 자신의 사적인 삶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가족에 대한 애증도, 가장 영민했을 20대 천재 수학자에게 군복을 입혀 감시했던 조국에 대해서도, 그는 분노도 자기연민도 드러내지 않았고, 그 두터운 침묵으로 세상의 숱한 질문에 답했다. nationalmedals.org에서.

22세 수학자 존 내시(John Nash,1928~2015)가 박사학위를 받기 2년 전인 1948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또 한 명의 20세 천재 펠릭스 브로더(Felix Browder, 1927~2016)가 비선형함수분석(Nonlinear functional analysis)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내시가 냉전기 가장 뜨거운 국방ㆍ행정 싱크탱크 ‘랜드 연구소 Rand Corporation’의 게임전략이론 컨설턴트로 스카우트되고 MIT의 ‘C.L.E무어인스트럭터’(임기 3년 박사급 연구직)로 임용되는 등 각광받던 것과 달리, C.L.E무어인스트럭터(48~50)를 끝낸 펠릭스에겐 어디서도 오라는 데가 없었다. 1930년대 절정의 미국공산당(CPUSA)을 이끌며 15년간 총서기를 지낸 그의 아버지 얼 브로더(Earl Browder, 1891~1973) 때문이었다. 49년 결혼(Eva Tislowitz)까지 한 그는 보스턴대 등 여러 대학에 취직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외면당했고, 어렵사리 53년 구겐하임 펠로십을 받자마자 징집영장이 나왔다. 당시 그가 적을 두고 있던 프린스턴고등연구소(IAS) 소장이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였다. 오펜하이머는 펠릭스의 징집연기 요청 서류에 서명해주지 않았다. 25세의 그는 군인이 됐다.

수학도 냉전의 과학이었다. 전후 설립된 미 해군연구청은 수학 연구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담당하던 곳이었고, 40~50년대 프린스턴대 수학과를 이끌며 브로더의 논문을 지도한 석학 솔로몬 레프세츠((Solomen Lefschetz,1884~1972)도 미 해군 고문으로서 유도시스템과 선박 안전성을 연구했다.

서슬 퍼렇던 미하원 비미활동위원회(HUAC)가 갓 입대한 전 공산당수의 장남을 그냥 내버려둘 리 없었다. 53년 4월 그에 대한 HUAC 청문회가 열렸다. 여러 학자들이 증언대에 섰고, 그 가운데 MIT의 수학자 노먼 레빈슨(Norman Levinson, 1912~1975)이 있었다. 레빈슨은 그 부조리에 좀 화가 난 듯도 하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이 청년을 잘 안다. 그는 16살에 경이로운 성적으로 MIT에 입학해 2년 만에 졸업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MIT 수학과가 생긴 이래 90여 년을 통틀어 가장 우수한 학생이고, 프린스턴대에 진학해서도 빼어난 실력을 과시했다. 지금 그의 나이는 스물 대여섯일 테지만, 그는 이미 생존해 있는 가장 우수한 수학자들 중 한 명이며, 나나 어제 이 자리에 섰던 마틴 박사(Martin Davis)보다 훨씬 뛰어난 수학자다.

나는 그와 많은 얘기를 나눴고, 그가 반공주의자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지금 러시아를 이끄는 이들을 독재자 혹은 파렴치한으로 간주하며, 그렇게 내게 말하기도 했다.(…) 그는 편미분방정식 분야의 선두그룹 학자다. 그 분야는 레이더와 제트추진력, 핵융합 이론을 포함, 모든 물리의 기본법칙과도 연관되는 분야다. (…) 나는 그에게 아버지의 죄를 대신 묻을 게 아니라 기회를 주는 것이 (비미국적이기는커녕) 미국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history.mcs.st-and.ac.uk)

하지만, 그에게 총을 들릴 수도 비밀서류를 맡길 수도 없었던 미 육군은, 노스캐롤라이나 포트 브래그(Fort Bragg) 기지 작전차량 급유 호스를 들려 2년 가량 부렸다. 그가 차량 주유구와 씨름하던 54년, 내시는 동성애 혐의로 체포돼 랜드연구소에서 해직당했다.

펠릭스에게 기회를 준 것은 20세기 중반 미국사 요소요소에 오아시스처럼 등장하곤 하는 전 영부인 엘리노어 루스벨트(1884~1962)였다. 매사추세츠 주 월섬의 브랜다이스대학 이사회 의장이던 그는 대학과 이사회의 우려를 일축하며 갓 제대한 그를 조교수로 임명했다. 훗날 아버지보다 더 유명해진 펠릭스의 차남 빌(William)은 2015년 책 ‘Red Notice’에 이렇게 썼다. “당시 엘리노어는 ‘그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것 때문에 한 위대한 과학자의 앞길을 막는 것만큼 비미국적인 것(Un-American thing)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WP, 2016.12.15)

이제 브로더 가문의 3대 얼- 펠릭스- 빌이 모두 등장했다. 그들 중 한국에는 가장 덜 알려진 수학자 펠릭스 브로더가 지난해 12월 10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1930년대 미국공산당 당수 시절의 얼 브로더. 그는 공산주의야말로 20세기 미국의 이념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미국이 배타적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인민전선정부와 같은 국제주의적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spartacus-educational.com
美 골수 공산주의자 아버지 얼
10대 때부터 사회주의에 침잠
소련 엘리트 여성과 재혼까지
1930년대 미국공산당 거두로

얼 브로더는 캔자스 주 위치타의 교사 겸 농부 집안의 10남매 중 여덟째로 1891년 태어났다. 집에서 아버지에게 교육받고 10대 말에 통신강좌로 법학을 공부한 그는 회계원으로 일하던 16세에 미국 사회주의자당에 가입했고, 1910년대부터 노동운동 무대에서 좌파 조직가로 활동했다. 1차대전기인 17년 징집 반대운동 등으로 구속됐고, 19년 출옥 후 미국노동당 당수를 지낸 제임스 캐넌(James P. Cannon) 등과 함께 미국공산당 기관지인 일간 ‘The Workers World’를 창간해 초대 편집장으로 일했다. 윌리엄 포스터(William Z.Foster) 등과 노동조합교육연대 월간지 ‘The Labor Herald’를 창간한 것도 그였다. 미국공산당 원년 리더인 그들은 코민테른과 모스크바의 지침을 따랐고, 특히 얼은 “공산주의가 20세기 미국주의”(‘21세기 미국의 거버넌스’ 박찬욱 저, 서울대 출판부)라 믿던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21년 얼은 ‘프로핀테른(Profintern)’이라 불리던 노동조합국제연대(RILU) 창립식 미국 대표로 모스크바에 다녀온 이래 약 10년간 현지에 살다시피 하며 국제 공산당 지도 업무를 맡았고, 22년 갓 집권한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1930년 6월 귀국해 미국공산당 공동서기가 됐고, 2년 뒤 1인 당수가 돼 46년 실각할 때까지 미국 공산당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유부남(11년 결혼)이던 얼이 두 번째 아내 라이사 버크먼(Raissa Berkmann,1897~1955)을 만난 건 모스크바에서였다. 버크먼은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법학과를 나와 모스크바대와 레닌연구소에서 강의하던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얼은 26년 첫 부인과 이혼하고 버크먼과 재혼했고, 둘은 28년 모스크바에서 첫 아들 펠릭스를 얻었다.

버크먼은 33년 펠릭스와 둘째 앤드루(Andrew)를 데리고 캐나다 국경을 넘어 비자도 없이 미국으로 건너왔고, 이듬해 셋째 윌리엄(William)을 낳았다. 그는 55년 숨질 때까지 자신을 강제 추방하려는 당국과 기나긴 소송을 벌여야 했고, 얼은 공산당 후보로 36년과 40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고 41년 여권법 위반으로 14개월 옥살이를 했다. 40년대의 그는 혁명을 통한 적화가 아닌 동서 공존 즉, 인민전선 정부식 ‘미국적 공산주의’를 주장하다 당에서 축출당했다.

냉전에 휘둘린 석학 펠릭스
“MIT 수학과 사상 최우수 학생”
호평에도 아버지 탓 곤욕 경험
학문 올인… 최고 수학자 인정

세 형제는 공교롭게 모두 저명한 수학자가 됐다. 둘째 앤드루는 함수대수학을 전공해 브라운대 교수 및 석좌교수를 지냈고, 윌리엄은 대수위상수학으로 프린스턴대 교수와 미국수학회장을 역임했다. 윌리엄은 “우리 형제는 온갖 종류의 책에 파묻혀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큰 형 펠릭스는 이미 천재였는데 네 살 때부터 꽤 까다로운 수준의 책들을 읽었고, 학교에 진학해서는 교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곤 했다. 우리는 모두 상당한 수준으로 체스를 뒀고, 신문들을 열정적으로 읽었다”고 노스다코다대 수학계보학 프로젝트 에세이에 썼다. 펠릭스는 1998년 ‘뉴워크 스타 렛저(Newark Star-Ledger)’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투옥과 어머니의 소송 등은 유년의 자신들에게 정신적 외상을 남겼다며 “그건 정치적 문제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펠릭스는 브랜다이스 대학서 1년 강의한 뒤 예일대로 옮겨 7년, 시카고대에서 20년(11년 수학과 학과장)을 재직했고, 86년 뉴저지 주 럿거스대가 신설한 연구부총장에 취임해 91년까지 재직했다. 1999~2000년 미국수학회(AMS) 회장으로 일하며 수학 교육 및 연구기금 조성에 힘썼고, 시카고대 재직 중 ‘AMOCO 프로젝트’ 럿거스대의 ‘Outreach Program in Mathematics’ 등을 통해 청소년, 특히 여성과 소수자 과학기술 교육에 공을 들였다.(newyorker.com, 16.12.20) 미국과학아카데미 이사, 국립연구위원회 위원 등 말년의 그의 이력도 한결같이 수학 교육ㆍ연구 지원에 집중됐다. 펠릭스는 2000년 “비선형함수분석 분야를 창조적으로 개척하고 편미분방정식 응용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미국과학재단(NSF)이 선정한 과학기술인 최고 영예인 ‘미국 과학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수학은 우리의 삶 전반에 점점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컴퓨터는 근본적으로 수학적이며, 바이오테크놀러지와 물리학, 금융도 본질적으로는 수학적이다. 여러분이 뭔가를 제대로, 과학적으로 알려면, 먼저 수학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럿거스대 조셉 세네카 부총장은 “추상이론분야의 업적 외에도, 펠릭스는 수학이 우리의 문화와 문명의 핵심적 요소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고 평했다

공산주의자의 손자 빌은 수십 억 달러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가 돼 동구 자본주의화를 선도하고 푸틴 체제의 '무법 자본주의'에 맞서 싸웠다. 그는 가족의 구심력에 저항하는 삶으로 일관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잃지 않았다. wikipedia.com
반항적 자본주의자 아들 빌
파란만장한 가족 “엿 먹이려”
자본주의 첨병 펀드매니저로
동유럽 시장화 선도 아이러니

빌 브로더는 펠릭스가 오스트리아 홀로코스트 난민이던 아내 에바 티슬로비츠(Eva Tislowitz, 2015년 작고)와 1964년 낳은 둘째다. 장남 토머스가 무난히 시카고대와 캘리포니아대에서 입자물리학을 전공해 하와이대 물리학과 교수가 된 반면 빌은 꽤나 반항적인 청소년기를 보냈다. 훗날 책에서 그는 “내 집안에서는 천재가 아니면 설 자리가 없었다”고 썼는데, 그게 반항의 이유였을지 모른다. 그가 9살이던 73년 별세한 할아버지 얼의 이념적 카리스마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빌은 공부는 뒷전에 밀쳐두고 “머리 기르고 락밴드에 가입해 활동”하다 볼더의 콜로라도대에 “간신히” 입학했다.(NYT, 2015.2.1) 1년 뒤, 굳이 밀턴 프리드먼의 아성 시카고대 경제학과에 편입학하고 스탠퍼드에서 MBA를 딴 뒤 보스턴컨설팅그룹과 투자은행 살로몬브라더스에 취직해 펀드매니저가 된 것도, 그는 일종의 반항이었다고 말했다. “가족에게 ‘엿 먹이는(piss off)’ 걸로는 내가 자본주의자가 되는 것보다 더 나은 게 없었다고 생각했다.”(worldaffairsjournal.org, 2012.2) 그의 주무대는 갓 자본주의에 발을 담그던 동유럽과 러시아였다.

빌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90년 보스턴컨설팅그룹 동유럽 기업 사유화 컨설팅 프로젝트를 맡아 폴란드에 진출했다. “어느 날 신문 광고를 통해 기업공개 공고를 봤어요. 내 계산으로 그 기업 주당 가격이 전년도 순이익의 절반 수준이었어요.”(worldaffairs, 위 기사) 그는 통장의 돈 전액 4,000달러를 찾아 타이어업체와 은행, 무역회사 주식을 샀고, 1년도 안 돼 무려 10배를 벌어들였다. 훗날 책에서 그는 “그렇게 단숨에 떼돈을 버는 건 마치 크랙 코카인을 피우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일단 맛을 보면 또, 또, 또…, 반복하고 싶어지는 것이다”라고 썼다. 당시의 러시아와 동유럽엔, 정치적 리스크가 있긴 했지만, 그런 기회들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NYT, 위 기사)

그는 96년 에드먼드 사프라(Edmond Safra)가 투자한 2,500만 달러로 ‘허미티지(Hermitage) 자산운용’을 설립했고, 1년 반 사이 800%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노멘클라투라’들이 제약 없이 휘젓고 다니던 옐친 시장자유화 시대였다. 그는 98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영국 국적을 선택했다. 2000년 허미티지는 이머징마켓 최고수익률을 기록했고, 2005년 자산은 45억 달러로 불어났다.

하지만 기업의 수익 빼돌리기와 뇌물 상납 등 정경비리는 내내 투자의 걸림돌이었다. 빌은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회사 가즈프롬(Gazprom)의 비리 등을 폭로하는 등 시장 개혁에도 열정을 쏟았고, 2000년 집권한 푸틴 정부와도 초기에는 관계가 좋았다. 2006년 2월 ‘포브스’ 인터뷰에서 그는 러시아 개방경제 성장에 기여한 가장 큰 요소로 ‘올리가크(Oligarchsㆍ과두 경제특권층)’들에 대한 푸틴의 강력한 제제를 꼽았다. 국영기업체 대표를 단숨에 갈아치우는 그의 독재 행태를 두고 우려하는 서방 투자자들도 많았지만, 빌은 푸틴을 역성 들었다. “푸틴은 지금 우리가 싸워온 자들과 싸우고 있다. 그가 갈아치운 가즈프롬의 새 CEO는 적어도 현금에만 손을 대지 회사 자산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fobes.com. 2006.2.13)

하지만 그는 그 직후, 그의 표현에 따르면 푸틴이 기업 부패를 정부 독점부패로 바꾸고 있다는 걸 충격적으로 깨닫는다. 2005년 말 푸틴 정부는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그의 입국을 거부했고, 그는 현지 자산을 은밀히 팔아 여러 나라에 분산 투자를 해나갔다. 러시아 정부는 2007년 6월 탈세 등 혐의로 그의 러시아 법인과 자문 법률회사를 압수 수색했고, 현지 자산을 동결했다. 법적 공방 와중에 빌의 현지 고문변호사 세르게이 매그니츠키(Sergei Magnitsky)가 세무당국의 이중장부 등 수억 달러 규모의 비리 증거를 밝혀낸 뒤 재판 없이 구금 당했다. 매그니츠키는 2009년 11월 감옥에서 구타와 고문으로 살해됐다.

맹렬한 반푸틴 전사로 변신한 빌은 미국과 EU의회 등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고, 2011년 5월 미 의회는 ‘매그니츠키 법안’을 통과시켰다. 매그니츠키 살인 연루자를 포함, 민주주의 활동가와 언론인 등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 주체들의 미국 입국 불허와 미국 내 자산 동결 등이 골자였다. 그 사이 그는 모두 11차례 문자 메시지 등을 통한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고 한다. 영화 ‘대부 2’의 마이클 콜리오네의 대사-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게 있다면, 이 세상에 못 죽일 놈은 없다는 것이다- 란 문자를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법원은 13년 7월 궐석재판을 통해 빌에게 세금포탈 등 혐의로 9년 형을 선고했다. 유럽의회는 14년 4월 매그니츠키 살해 관련자 30여 명에 대한 입국 불허 등 제제조치를 가결했다.

계기가 있을 때마다 언론은 빌의 이야기 속에 얼과 펠릭스 3대의 사연을 끼워 넣곤 했다. 하지만, 기자들이 수도 없이 물어봤겠지만, 아들의 여러 선택을 두고 펠릭스가 가타부타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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