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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과 정부군이 바리케이트를 마주보며 대치하는 상황은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 속 명장면 중 하나다. 일촉즉발의 전장에서 시민들은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를 합창하며 의기를 다진다. 노래는 혁명의 연료가 되기도 한다. 희망을 위해 거리에 나온 이들은 같은 노래를 부르며 나아갈 길을 확인한다. 연대를 끈끈하게 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할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박근혜 대통령-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촛불집회에서도 노래가 끊이지 않는다. 흔들린 민주주의의 가치 회복을 위해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노래로 박 대통령을 비판하고, 새 시대의 희망을 노래했다.

시대가 흐르면 ‘거리의 노래’도 바뀌는 법이다. 정치색이 진한 민중가요는 사라졌다. 촛불을 든 이들은 비장하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대신, 친숙한 대중 가요로 한 마음을 확인했다. 광장에는 아이돌의 음악까지 울려 퍼졌다. 특정 운동권 단체가 주도 한 게 아니라 어린이, 학생, 성인 등 다양한 세대의 평범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시위를 이끌어 벌어진 변화다. 정치적 입장과 좌우이념과는 상관 없이 촉발된 시민들의 저항이란 점이 촛불집회 속 노래에 정치색을 몰아 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 8주 동안 전국 각지의 광장에서 울려 퍼진, 기존 집회 현장에선 들을 수 없었던 의외의 노래를 꼽아봤다.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주연 배우였던 배우 하지원과 현빈. 한국일보 자료사진
드라마 ‘시크릿가든’ OST ‘나타나’

“왜 내 눈앞에 나타나~” 2010년 방송된 드라마 ‘시크릿가든’ OST인 ‘나타나’는 지난달부터 촛불집회 인기 곡으로 급부상했다. 집회에 난데 없이, 그것도 6년 전 방송된 드라마 삽입곡이 광장을 휩쓴 이유는 박 대통령과 ‘시크릿 가든’과의 인연이 깊어서다. 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찾은 차움병원의 진료 카드에 이름이 드라마 주인공인 길라임이란 가명으로 기록된 것이 알려진 뒤다. 이를 비꼬는 의미로 시민들이 박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며 ‘나타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음원사이트에서 6년 전 노래를 다시 찾는 사람도 생겼다. 6개 음원 사이트의 음원 소비량을 조사하는 가온차트 관계자에 따르면 ‘나타나’는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집계한 음원 순위(다운로드+스트리밍)1000위 안에 들었다. 노래만 화제가 됐던 게 아니다. 배우 현빈이 드라마에서 입어 화제가 된 반짝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거리로 나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의상대여 전문 업체 ‘진시리닷컴’은 현빈이 입었던 트레이닝복 대여 서비스까지 실시해 눈길을 끌었다. ‘그게 최순입니까, 확 siri해요’ ‘하야왓숑’ 등 드라마 속 대사를 패러디 한 플래카드도 여럿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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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소녀시대의 히트곡 '다시 만난 세계'는 20~30세대의 '저항가'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눈 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20~30세대는 촛불집회에서 그룹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2007)를 자주 불렀다. 곡 속 어두운 현실이 지금과 다르지 않은데다, 그 위기를 열정으로 이겨 내겠다는 의지를 노랫말로 대신 하고 있는 것이다. 1980~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에 ‘다시 만난 세계’는 새로운 ‘시위가’였다. 이 곡은 이화여대생들이 지난 7월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발해 본관 점거 농성을 벌일 때 경찰 앞에서 부른 영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퍼지면서 저항의 노래로 재조명됐다. 당시 이화여대생들은 서로 팔을 잡고 ‘벽’을 쌓아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서로 용기를 북돋았고, 자신들을 끌어내기 위해 투입된 경찰에 맞섰다.

아이돌 K팝은 촛불집회에서 자주 울려 퍼진다. 그룹 빅뱅의 히트곡 '뱅뱅뱅'이 특히 인기다. YG엔터테인먼트 제공
빅뱅 ‘뱅뱅뱅’

밀레니얼 세대에 K팝은 하나의 ‘언어’다. 촛불집회에 나온 청춘은 K팝을 활용해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지난해 최대 히트곡인 그룹 빅뱅의 ‘뱅뱅뱅’이 대학생 혹은 중·고등학생들이 모인 시위에서 특히 많이 나왔다. 후렴구 하이라이트인 “빵야, 빵야, 빵야”를 “하야, 하야, 하야”로 바꿔 청와대를 향해 그들의 외침을 전했다.

집회의 저항적 성격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사랑에 빠진 소녀의 마음을 노래한 그룹 트와이스의 ‘티티(TT)’를 함께 부르는 청소년들도 집회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집회에 참여한 또래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 K팝을 부른다고 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5차 촛불집회에서 ‘전국청소년비상행동’이 주최한 자유 발언을 마치고 기자와 만난 박주용(17)군은 “민중가요는 특정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만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부르는 느낌이라 부정적이고 갇혀 있는 이미지”라며 “더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 집회의 뜻을 알리는 데는 K팝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의 히트곡 '하여가'는 '하야가'로 바뀌어 촛불을 데운다.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추억의 댄스 곡들도 촛불을 밝히는 데 많이 쓰였다. 199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히트곡 ‘하여가’가 대표적이다. 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순실에게 모든 걸 뺏겨버렸던 마음이, 다시 내게 돌아오는 걸 느꼈지”란 식으로 가사를 바꿔 박 대통령과 최순실씨 사이를 꼬집었다. 그룹 GOD의 ‘촛불 하나’도 제목이 집회의 상징인 촛불과 맞아 떨어져 집회 현장에서 적잖이 울려 퍼졌다.

남성 듀오 십센치의 히트곡인 ‘아메리카노’는 ”아메리카노 좋아 좋아 좋아” 부분이 ”박근혜 하야 좋아 좋아 좋아”로 바뀌어 ‘하야송’으로 인기를 누렸다.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도 종종 흘러 나왔다. 박 대통령과 최씨의 만남이 잘못됐다는 풍자하는 곡으로 사용됐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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