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어빙 프래드킨

주민들이 1달러씩 기부해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는 청년들은 없게 하자는 취지의 1달러 장학사업 'Dollars for Scholars'로 미국 최대 민간 장학재단 'Scholarship America'를 만들어 낸 어빙 프래드킨. 그의 장학사업은 기적처럼 성공했지만 덩달아 솟구쳐온 대학 학비를 따라 잡지는 못했고, 그는 그 현실에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그래도 지난 3월, 95세 생일 파티 땐 저렇게 웃었다. SA 홈페이지.

원칙은 단순해야 힘이 있고, 담백한 미덕은 감동도 크다. “난 한 놈만 팬다”던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의 청년, “상관없다, 즐거우면 된다”던 ‘타락천사’의 청년이 예가 될지 모르겠다. 내일 어찌되건 당장 눈앞의 배 곯는 길고양이를 외면할 수 없다는 맹목의 선량함도, 더러 주변 사람들을 답답하게도 하지만, 앞뒤 재고 따지며 한없이 우회하려는 이성을 머쓱하게도 한다. 그런 감동은 계산을 뛰어넘고 수식(數式)을 허물며 온다.

1958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폴 리버(Fall River)의 젊은 검안의 어빙 프래드킨(Irving Fradkin)이 1달러 장학캠페인을 시작하면서 ‘계산’을 안 한 건 아니었다. 3만여 가구 주민들이 가구당 1달러씩만 내면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아이들은 없겠다는 계산. 섬유산업이 쇠퇴하면서 마을 직물공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던 때였고, 주민 중 대졸자는 3% 고등학교를 못 마친 이도 40%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주립대학 등록금은 약 200달러. 당시 1달러는 지금으로 치면 8달러쯤 되는 돈이었다.

유대인 이민2세로 성장하며 교육의 중요성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그답게 그는 가난을 이기고 마을을 살리는 길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길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집집마다 돌면서 취지를 설명했고, 피켓과 헌금함을 들고 거리에 나서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 시작한 ‘Dollars for Scholars’캠페인으로 그는 그 해 말 4,500달러를 모금, 고교 졸업반 24명에게 100~300달러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2015년 말 현재 1,100개 지부를 둔 미국 최대 비영리 민간 장학ㆍ교육 재단 ‘Scholarship America’가 그렇게 탄생했다. FBI가 시민 세금으로 시민들을 사찰하고, 의회가 매카시즘으로 ‘애국’할 때, ‘1달러 장학금’으로 자신의 애국을 시작했던 어빙 프래드킨이 11월 19일 별세했다. 향년 95세.

프래드킨의 아버지(Abraham)가 러시아를 떠나 단신 미국으로 건너온 건 1912년이었다. 유대인 차별을 피해 ‘풍요의 나라(golden country)’에서 자리를 잡아보자는 결심. 그는 제빵 기술을 익혔고, 5년 뒤 아내(Eva)를 초청했다. 아내는 어린 다섯 남매를 데리고 1차대전의 유럽 전장을 뚫고 키에프에서 네덜란드로, 미국으로 왔다. 다시 5년 뒤인 1921년 3월 28일 매사추세츠 주 첼시에서 7남매의 막내 어빙이 태어났다.

어린 프래드킨의 꿈도 아버지처럼 빵집을 운영하는 거였고, 주말마다 가게 일을 거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축구를 하다가 허벅지와 엉덩이를 심하게 다쳐 다 나은 뒤로도 오래 서 있는 게 힘들어졌고, 16살 무렵 지독한 근시였다가 안경을 맞춰 쓴 뒤 꿈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그는 자서전 ‘Dollars for Scholars(1993)’에 썼다. “내 눈앞(vision)이 환해지면서 내 미래도 더불어 환해졌다. 나는 검안사가 돼 내가 도움을 받은 것처럼 남도 돕겠다고 결심했다”(WP, 2016.12.3)는, 조금은 억지스럽고 동화 같은 이야기. 기적 같은 장학사업으로 가난한 청소년들의 시력뿐 아니라 삶의 미래를 밝혀준 그를 두고 훗날 코미디언 샘 리벤슨(Sam Levenson)은 “비전을 지닌 검안사(optometrist with a vision)”라 칭송했다.(NYT, 16.12.2)

부모는 빵 가게 하나로 7남매를 교육시켰다. 프래드킨도 첼시고교를 거쳐 43년 매사추세츠칼리지(현 뉴잉글랜드칼리지) 검안과를 졸업, 이듬해 아버지에게서 빌린 돈 700달러로 검안과 의원을 열었다. 프래드킨은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훗날 손녀 제시카 게쉰(Jessica Gashin)이 들려준 일화. “할아버지는 내 바이올린 발표회나 이런저런 학교 행사 때마다 빠짐없이 참석하곤 했어요. 부모님은 좀 숫기가 없는 분들이지만, 할아버지는 달랐죠. 그렇게 와서는 떠날 때 참석자와 모두와 안면을 트곤 했어요.”(heraldnews.com, 16.11.20) 물론 장학기금 모금을 위한 것이기도 했겠지만, 그건 노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는 자기 이름에 있지도 않던 미들네임 ‘A’를 붙이곤 했는데, 그건 ‘Anything’의 머리글자였다.

프래드킨은 눈 검사를 위해 찾아온 이들, 아이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곤 했다. “네 꿈이 뭐니?”그는 고교 졸업 후 취직할 거라는 대답, 돈이 없어서 대학을 못 간다는 대답을 듣곤 했다. 그는 장학사업을 위해 1957년 폴 리버 교육위원회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그에게 잔뜩 기대를 걸었다는 한 아이가 비탄에 잠겨 했다는 말-“선생님이 선거에 지는 바람에 우리도 대학을 못 가게 됐다”-은 그에겐 채찍 같은 거였을 것이다.(NYT, 위 기사) 그는 자신의 취지에 공감한 한 노동운동가(대니얼 매카시 국제 여성복노조 폴 리버 지부장)의 도움을 받아 이듬해부터 ‘1달러 장학금’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백악관을 비롯해 온갖 곳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고, 전국 유명 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을에선 짬 날 때마다 각 가정을 방문하고 가두모금을 했다. 첫 해 모금액 4,500 달러는, ‘계산’에는 못 미치는 거였지만 희망을 갖기에는 넉넉한 성과였을 것이다. 극빈자 보조금으로 생활하면서 월 25센트씩 할부로 기부금을 낸 이도 있었고, “아이들은 나보다 더 나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며 기부에 동참한 트럭 기사도 있었다고 한다.(WP, 위 기사) 전하는 버전에 따라 시점은 엇갈리지만, 전 퍼스트레이디 엘리노어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가 1달러를 보내온 건 캠페인을 갓 시작한 직후였던 듯하다. 대통령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도 기부금과 함께 전보로 그의 활동을 격려했다. 그 덕에 신문과 방송, ‘리더스 다이제스트’같은 잡지들이 그의 호소에 주목했다. 2년 뒤인 1960년 모금액은 1만7,000달러. 그 가운데 1만4,000달러가 ‘1달러’ 기부였다. ‘Dollars for Scholars’는 그 해 70명을 대학 보냈다. 프래드킨은 “장학금은 가난한 이들에게 거저 주는 시혜(hand out)가 아니라 그들을 더 높은 자리로 받쳐 올리는 것(hand up)”이라고 말하곤 했다.

캠페인 규모가 커지면서 프래드킨은 61년 ‘미국시민장학재단(CSFA)’을 설립했고, 합병 등 이런저런 계기로 명칭을 바꿔오다 2003년 지금의 ‘Scholarship America(SA)’로 정착했다. 미네소타 주 세인트 피터스에 본부를 둔 SA는 1958년 이래 지금까지 약 35억 달러를 모금해 220만 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2013년 10월 케이티 커릭(Katie Couric)의 ABC 토크쇼 'Katie'에 출연한 프래드킨. 방송에는 그의 장학금 수혜자들이 일부 출연하기도 했다. 이듬해 커릭은 자신의 책 수익금을 SA에 기부. 'Dream Award' 장학금을 만들었다. best.dollarsforscholars.org

장학ㆍ후원 사업의 성패는 기금 운영의 투명성과 비용 합리성 등에 크게 좌우된다. 도덕성과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SA는 미국 자선평가기관 ‘Charity Navigator’ 선정 10년 연속 최고 등급을 받아왔다. SA는 직접 모금 외에도 전국 1,300여 개 기업과 재단, 협회 및 개인들의 후원사업을 자문하거나 관리ㆍ대행해주고, 그 수수료를 운영비와 장학사업에 보태고 있다. 빌 클린턴 등이 설립한 9ㆍ11 희생자 자녀 장학펀드도, 방송인 케이티 커릭(Katie Couric)의 출판 수익금으로 운영되는 ‘Dream Award’ 사업도 SA가 맡고 있다. 프래드킨은 “아이들에게 꿈을 주면 그 꿈은 아이들뿐 아니라 가족과 나라에 보탬에 된다. SA는 단순한 장학프로그램이 아니라 미국의 꿈을 새롭게 점화하는 프로그램이다”라고도 했고, “청소년이야말로 황금이나 석유보다 더 소중한 미국의 자산”이라고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SA의 실적 가운데 프레드킨의 ‘Dollars for Scholars’가 거둔 기부금만 약 6억 달러(75만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2013년 프레드킨이 은퇴할 무렵 SA는 상근 직원 160명의 거대 조직이 됐다. 재단이 커진 만큼 대학 등록금도 비싸졌다. 그 해 7월 ‘SouthCoast Today’라는 매체 인터뷰에서 그는 “대학시절 내가 낸 1년 등록금은 350달러였다. 현재 평균적인 검안사 졸업생 학자금 대출금이 14만~50만 달러에 달한다. 이건 완전히 딴 세상 얘기다”라고 말했다. “대학 학비가 너무 비싸져서 이젠 부자들의 게임이 돼버렸다. 이건 미국의 위기다. 미국의 쇠락은 아이들이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개인과 기업의 공익 기부, 혹은 기업 윤리와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사회적 기업들의 실험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자본주의 4.0’이나 ‘박애자본주의’같은 용어들이 그 과정에서 탄생했다. 저널리스트 출신 행정가 매튜 비숍 등이 쓴 ‘박애자본주의’(안진환 옮김, 사월의 책)는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 등이 주도하는 거대 자선사업과 이른바 ‘착한 기업’들의 대안적 활동 외에 중국 배우 리롄제(李蓮杰)이 ‘1인 + 1달러+ 1개월= 커다란 한 가족’을 모토로 2007년 설립한 ‘원재단(One Foundation)’ 등을 소개하며 “박애자본주의의 혁명이 엄청난 부자 친구 한 명의 수십억 달러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수십 또는 수백 달러가 모이는 대규모 자선기부활동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기부에서 자본주의의 희망을 찾았다.

반면 홍콩 출신 중국 경제학자 가오렌쿠이(高蓮奎) 같은 이들은 그 희망을 천진난만한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복지사회와 그 적들’(김태성 등 옮김ㆍ부키)에서 ‘사회복지의 자선화’를 경계하며, 그런 논리는 필연적으로 정부의 공공서비스 기능 축소를 전제하지만 그건 갈수록 복잡해지는 사회 현실에 역행한다고 주장했다. “사회 복지가 자선을 대신할 수는 있지만, 자선은 결코 사회 복지를 대신할 수 없다. 자선은 그 자체가 복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다.” 그는 ‘미국 부자들은 열정적으로 기부한다’는 말도 언론이 만들어낸 허구이고, 그마저도 대부분 세금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며 “미국 전체 자선 기부금의 70%는 중산층의 개인 기부금”이라고 썼다.

양자는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지만, 작은 정부와 큰 정부의 차이만큼 사뭇 다른 판단과 전망 위에 서 있다. 뭐가 옳다는 판단도 아직은 섣부르다. 아나톨리 칼레츠키가 ‘자본주의 4.0’을 출간한 건 2010년이었고,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도 채 10년이 안 됐다.

어빙 프래드킨의 장학사업은 당연히 전자의 편에 선 시도지만, 재단보다 더 난폭하게 팽창한 대학 등록금 현실은 후자의 진단을 지지하는 논거가 될 것이다. 물론 약 60년 전의 그는 저런 계산과 판단 없이, 가난한 이민자 가족에게 미국이 제공한 기회를 힘 닿는 대로 갚고자 저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이 기질에 맞고, 보람도 있고, 무엇보다 즐거웠을 것이다.

1988년 프래드킨은 심장발작으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있었다. 당시 그를 돌본 간호사(Pauline Sardinha)가 그의 장학금으로 간호대학에 진학한 이였다. 2013년 2월 은퇴식에 참석한 장학금 수혜자들- 지역 판사, 변호사, 교수ㆍ교사, 교육위원회 위원 등- 앞에서 그는 “그날 그 병원 간호사가 없었다면, 지금 내가 여기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서 프랭크(Arthur Frank)라는 변호사는 75년 고교를 졸업할 때 그의 장학금 250달러를 받지 못했다면 브라운대학 진학을 포기했을 테고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석자 대다수도 아마 그와 다르지 않은 처지였을 것이다.

폴 리버 시는 중앙광장 이름을 ‘Dr. 어빙 프레드킨 광장’으로 명명하고, 도시의 문장에 ‘Scholarship City’라는 문구를 새겼다. 그는 이민자였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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