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스에서 만난 고마운 인연, 가나코. 마음을 담아 사진을 선물했다.

잊지 못할 기차여행이 있다. 19세기 영국 귀족들의 호화여행을 21세기에 재현한 로보스 열차를 탔을 때다. 기차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프리토리아에서 케이프타운까지 1,600km를 2박 3일간 느리게 달렸다. 열차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이들이 타고 있었다. 기차에서 만난 가나코는 남편 토마스와 함께 환갑기념으로 로보스를 타러 왔다고 했다. 우리는 말이 잘 통했고, 오가며 따뜻한 미소를 나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가나코가 나를 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막을 알고 보니, 로보스 측에서 승객들 이름과 국적, 나이를 깔끔하게 프린트해 나누어줬는데, 내 국적이 ‘북한’으로 되어 있었던 것. 평양에 사냐는 질문에 서울에 산다고 하자, 그제야 호기심을 거두고 경계심을 풀었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됐다. 2박 3일 기차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케이프타운. 케이프타운에 사는 가나코는 “숙소 정하지 않았으면 우리 집에 머무를래”라고 기대하지 못한 제안을 했다. 낯선 이를 집으로 초대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 가나코의 초대가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나코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 친구가 놀러 왔다고 전했고, 가나코의 친구인 나루 아줌마는 순창고추장을 싸 들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연이은 환대에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북한’이라고 잘못 쓰인 종이 한 장이 만들어준 인연이었다.

히말라야에 있는 작은 마을. 춥다고 했더니 꼬마 텐징이 와서 꼬옥 안아줬다.

길 위에서 고마웠던 순간을 생각하니, 보츠와나의 오카방고 델타를 여행할 때가 떠오른다. 원시체험을 하는 부시먼 캠프로 떠났는데, 이유 없이 배가 아팠다. 가지고 있던 약을 다 먹었는데도 효과가 없었다. 약국은커녕, 물 한 통도 살 수 없는 오지였다. 그때 스위스에서 온 친구 샌드라가 다가와 손을 펼쳤다. 하얀 손바닥 위에는 알약이 놓여 있었다. 그녀도 얼마 전 나처럼 아픈 적이 있었다며 이 약을 먹으면 나을 것이라 했다. 샌드라가 내민 약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다. 그 약은 샌드라에게 남은 마지막 한 알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샌드라가 아프게 되면 이 약이 꼭 필요할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괜찮다며 네가 얼른 낫는 게 지금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결국 약을 받았고 약 때문이었는지 따뜻한 그녀의 마음 덕분이었는지,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행자들에게 특히 너그러운 중동. 여행도 가족단위로 다닌다. 사원에서 만난 가족들과 함께 따스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필리핀 첫 여행 때였다. 배를 타고 보라카이 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항구에 갔는데 가이드북에 나온 배는 찾을 수가 없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자기 집 앞에 보라카이로 가는 배가 있으니 따라오라고 했다. 아주머니를 따라 배를 타고 1시간쯤 달리니 선착장이 나타났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섬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달렸다. 과연 이 길이 맞는지, 이 아주머니가 설마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났다. 결국 항구 근처에 도착한 것은 깜깜한 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주머니는 내 손을 이끌고 당신 집으로 갔다. 중학교에 다니는 작은 딸 방을 내주더니, 오늘은 이곳에서 자라고 하는 게 아닌가. 하루 종일 아주머니의 선의를 의심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다음날 작은딸에게 어울릴만한 예쁜 티셔츠와 볼펜을 선물하고 보라카이행 배에 올랐다.

여행을 하다 보면 조건 없는 사랑을 자주 받는다. 베트남에서 길을 인도해준 친구와 손을 잡고 한컷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이들에게 받은 사랑 이야기는 책 한권을 써도 부족하다. 기억하지 못한, 감지하지 못한 배려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처음에는 조건 없는 배려를 받는 것이 어색했다. ‘혹시 뭔가 팔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돈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겠지?’ 친절을 선물 받으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세상이 험해지긴 했지만, 사람들이 베푸는 마음의 십중팔구는 진심이었다.

티벳의 룽다. 좋은 말씀과 따뜻한 마음이 바람에 실려 세상 곳곳으로 뿌려진다.

잊지 못할 케이프타운 여행을 마치고 가나코에게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때 가나코가 했던 한마디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길 위에서 받은 사랑은 또 다른 여행자에게 베풀면 돼. 너에게 주는 사랑은 이미 내가 길 위에서 받았던 거야. 네가 아무 대가 없이 누군가에게 베풀면 그 사랑이 또 다른 사람에게 이어지고, 그렇게 세상은 조금 더 살만한 곳이 될 테니까.”

채지형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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