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시모어 페퍼트

시모어 페퍼트는 컴퓨터 기반 문명의 기틀을 닦은 과학자이자 컴퓨터 활용 교육의 엄청난 가능성을 가장 먼저 깨달은 교육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컴퓨터에 의해 끌려가는 게(programmed) 아니라 스스로 끌고가야 한다(programming)고 여겼고, 커리큘럼 등 지침과 표준에 갇히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했다. MIT 미디어랩.

193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 행정수도 프레토리아에 자동차라면 환장하던 한 아이가 살았다. 특이한 건 그를 매혹시킨 게 장난감이 아니라 진짜 차였고, 구르는 바퀴가 아니라 바퀴를 구르게 하는 기어였다는 점이다. 하나를 돌리면 맞물려 따라 도는 톱니바퀴들, 원인과 결과, 이빨의 크고 작음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속도와 회전비의 새로운 차이들…. 그 현란한 감각자극이 좋았던 아이는, 눈감고 가상의 게임을 즐기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체스 이야기’ 주인공처럼, 천장을 보고 누워서도 온갖 기어들을 머릿속으로 돌리곤 했다고 한다.

학교에 입학한 그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분수나 함수 같은 수학적 추상의 원리들이 이미 제 머릿속에 있다는 걸 안다. 간단한 방정식쯤은 가상의 기어들로 풀어내곤 하던 그는 그 쉬운 문제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과, 그 재미있는 문제들을 재미없이 가르치는 선생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년의 그가 수학자가 되고, 또 결국 교육(학)자가 된 건 어쩌면 맞물린 기어의 귀결, 혹은 운명 같은 거였을지 모른다. 다만 교육자로서 그가 선택한 교보재는 기어가 아니라, 그 무렵 두 번째로 빠져든 사랑의 대상, PC였다. 60년대 개인용 컴퓨터가 갓 등장한 때였다.

바로 그가,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 1927~2016)와 함께 쓴 저서 ‘퍼셉트론(Perceptron, 1970)’으로 인공지능(AI) 연구의 주춧돌을 놓고, 최초의 어린이용 컴퓨터 코딩 프로그램 ‘로고(Logo, 1968)’를 만들어 보급했고, 컴퓨터와 교육, 창의에 대한 혁명적 교육철학서 ‘마인드스톰(Mindstorms, 1980)’을 쓴 시모어 오브리 페퍼트(Seymour Aubrey Papert)다.

과학자로서 그는 지금 인류가 누리는 컴퓨터 기반 문명의 기틀을 닦는 데 기여했지만 무엇보다 교육자로서, 인류가, 특히 유년의 아이들이 그 문명에 갇히지(programmed) 않고 창의적으로 선도(programming)하도록 하는 데 공을 들였다. 그와 더불어 저 유명한 MIT 미디어랩을 설립하고 이끈 니콜러스 네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 1943~)의 의미심장한 비유를 빌자면 그는 “(AI의 거장인) 마빈 민스키나 (랩탑ㆍ태블릿PC의 아버지라 불리는) 앨런 케이(Alan Kay,1940~) 등 거인들을 제 어깨 위에 무동 태운”사람이었다. 7월 31일 그가 조용히 별세했다. 향년 88세.

페퍼트는 1928년 2월 29일 남아공에서 태어났다. 체체파리를 연구하던 생물학자 아버지는 어린 페퍼트를 데리고 남아공 동부 오지를 누비고 다니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채 두 살도 안 된 페퍼트는, 성가신 파리보다는 가족이 태우고 달리는 자동차와 집 차고에 널려 있던 차 부품들이 더 좋았다. 2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된 그의 혁신적 교육철학서 ‘마인드스톰’ 서문‘내 어린 날의 기어들 The Gears of My Childhood’에 그는 그 이야기 일부를 소개했다.

그는 요하네스버그 위트워터스랜드(Witwatersrand)대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한 뒤 52년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땄고, 영국 캠브리지 존스 칼리지에서 두 번째 수학 박사학위(58년)를 땄다. 학위 과정 중 프랑스 파리대학 앙리 포엥카레연구소에 잠시 머물던 무렵 스위스의 저명한 발달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Piaget, 1896~1980)를 만나 깊은 인상을 받았고, 58년 제네바대학 ‘피아제 연구소’(International Center of Genetic Epistemologyㆍ발생론적인식론국제센터)로 건너가 약 4년간, ‘구성주의(Constructivism)’로 알려진 피아제의 인식론을 연구했다. 구성주의란, 학습의 중심이 교사가 주도하는 지식의 전달(transmission)이 아니라 학생이 주도하는 지식의 재구성(reconstruction)에 있다는 이론이다. 즉 학습자는 세계를 이해하는 독자적인 모델을 구축해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 알던 지식 위에 새로운 정보들을 쌓고 배열한다는 것. 구성주의는 커리큘럼의 강제, 정답과 오답의 명확한 경계, 정답에 이르는 단 하나의 해법을 부정하며, 인식론적 다원론 즉 정답을 찾아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며 오류도 회피하고 감춰야 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입체적으로, 창의적이고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판단한다. 유년의 페퍼트가 기어로 터득했던 그 방법론이었다.

페퍼트는 학습의 효율은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물을 창의적으로 만지는 과정,뭔가를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제고될 수 있다는 이론(Constructionist Theory)으로 피아제의 인식론과 교육철학을 확장했다. 그 사물이 페퍼트의 기어처럼 각자에게 의미 있는 사물(meaningful product)일수록 학습 효율은 커진다. 아이들은 지식을 구성하는 주체로서, 가르침을 받을(instruct) 때보다 직접 만들고 구성(construct)하면서 배우고, 스스로 사고하면서 개념을 확장하고, 그 과정을 통해 어려움의 재미(hard-fun)를 깨달아간다는 거였다. “최고의 게임은 아이들로 하여금 어렵게 도전해서 뭔가를 이루도록 유도하는 게임이다. 쉽다고 선전하는 게임 광고를 본적 있는가? 학교 커리큘럼이 잘못된 점은 지식을 잘게 쪼개 전달함으로써 학습을 최대한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학교를 싫어하는 까닭은 공부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지겹고 따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는 커리큘럼 디자이너는 게임 디자이너에게 학습의 원리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edsurge.com, 2016.8.3)

그는 70년대 매사추세츠주 한 고교에서 수학 학습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지켜본 미술 비누조각 수업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문제를 던져주고 수업이 끝나면 풀이도 끝나고 마는 수학 수업과 달리, 미술 수업에서는 몇 주를 두고 비누조각을 하더라는 거였다. 생각하고, 꿈꾸고, 해놓은 걸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려면 다시 시도하고, 친구들과 대화하며 서로의 작품을 참조도 하더라는 거였다. 그는 “수학자들이 하는 수학 연구 방식이 그렇다”고, “고교생들의 수학 수업은 그게 아니더라”고 말했다.(NYT, 16.8.1)

피아제연구소 시절인 1960년, 페퍼트는 런던에서 열린 한 정보이론 심포지엄에서 민스키를 처음 만났다. 둘의 발표 정리(theorem)가 우연히 동일한 테마였고, 그들은 AI연구와 학습프로세서 연구의 접점을 발견한다. 63년 페퍼트는 협력연구원(research associate) 자격으로 민스키의 MIT AI랩(현재의 CSAIL)에 합류했고, 67년 응용수학과 교수겸 AI랩 공동책임자가 됐다. 둘은 인공지능 연구의 혁명적 전환점으로 꼽히는 저서 ‘퍼셉트론’을 공동 집필했다.

페퍼트는 1968년 만든 최초의 어린이 코딩프로그램인 '로고'를 만들었고, 그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이 직접 저 '거북'을 조작할 수 있도록 했다. PC 가격이 수십 만 달러씩 하던 그 무렵부터 그는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PC를 가지게 되는 시대를 준비했다. MIT 미디어랩

페퍼트에게 컴퓨터는 유년의 기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창의적 가능성을 지닌 “기계들의 프로테우스(Proteus of Machines)”였다. 특히 프로그래밍(코딩과 디버깅)은 아이들에게 “각자의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길(way to think about their own thinking)”을 열어줄 수 있는 효과적인 학습법이었다. 1968년 그는 ‘로고(Logo)’라는 최초의 어린이용 프로그래밍 언어, 즉 장난감 로봇 거북을 컴퓨터로 원격 조종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동시키고 싶은 방향과 각도, 거리 등을 지정하는 단순한 명령어를 순서대로 배열하면 로복 거북이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놀이 같은 코딩 프로그램이었다. 로봇 거북은 훗날 모니터 이미지로 바뀌어 컴퓨터 게임화했고, 이동 궤적이 선분으로 표현되게 함으로써 삼각형 등 도형과 기하학의 개념을 이해하게 했다. 그는 아이들이 ‘로고’와 사랑에 빠지기만 하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나아가는 데는 무수한 경로가 있다는 것(인식론적 다원론), 무수히 잘못 가더라도 수정하면 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걸 배우게 된다는 것(코딩-디버깅의 가치), 스스로 점점 더 어렵고 복잡한 경로들에 도전하는 즐거움(하드-펀) 등등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개념화하고, 체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PC 한 대 가격이 수십만 달러씩 하던 60년대에, 그는 저런 생각을 했고 또 실천한 선구자적 몽상가였다. 훗날 ‘로고’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스크레치(Scratch)’를 개발한 MIT 미디어랩 소장 미첼 레스닉(Michel Resmick)은 “페퍼트는 이미 그 무렵부터 모든 아이들이 컴퓨터를 이용해야 하고, 그런 날이 올 것이라 예견했다”고 말했다.(NPR, 16.8.5) 그리고, 페퍼트가 궁극적으로 생각한 것은 컴퓨터의 교보재로서의 가치를 넘어 “아이들이 컴퓨터에 갇히지 않고(programmed)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탠퍼드대 파올로 블릭스타인 교수는 “하지만 지금도 그 두 패러다임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다. 기계가 아이들을 조종하는가, 그 반대인가?

2008년 레스닉은 페퍼트의 기어 사랑에 빗대어 ‘시모어의 아이디어와 사랑에 빠지다(Falling in love with Seymour’s Idea)’라는 글을 썼다. 그는 1982년 페퍼트를 처음 만난 이래 그의 아이디어에 사로잡혔고 “페퍼트의 아이디어는 내게 목표와 사명과 일의 의미를 부여했다”고 썼다. 그는 언젠가 자신의 스크래치 프리젠테이션이 끝난 뒤 가진 질의응답에서 누군가가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은) 페퍼트가 20년도 더 전에 한 일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 질문은 나에 대한 일종의 비판이었지만 나는 그걸 칭찬으로 이해했고 “예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 생각에 시모어의 아이디어는 그가 1980년 ‘마인드스톰’을 쓰던 무렵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숙제로 남아있다. 그의 아이디어는 내게 방향과 비전과 목적의식을 제시했고, 나는 여전히 그것과 사랑에 빠져 있다. 내 남은 생의 전부를 바쳐 시모어의 비전이 실현될 수 있다면 나는 무척 행복하고 자랑스러울 것이다.”

앨런 케이가 페퍼트의 거북이에서 태블릿PC의 원형인 다이나북(Dynabook)의 아이디어를 얻은 일화도 유명하다. 케이는 “컴퓨터와 어린이 교육과 관련된 내 아이디어의 대부분은 시모어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NYT, 위 기사)

2014년 봄 MIT미디어랩에서 열린 '시모어 페퍼트로부터 배우기' 강연회 장면. 왼쪽부터 마이클 레스닉, 마빈 민스키, 앨런 케이, 니콜러스 네그로폰테. 네그로폰테는 자신들이 페퍼트의 어깨에 올라탄 덕에 거인이 됐다고 말했다. 유튜브

20대 남아공 학창시절 페퍼트는 열성적인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가였고, 투옥 전의 넬슨 만델라를 만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인종 편견을 극복하게 된 데는 유년시절 아버지를 따라 흑인들밖에 없는 남아공 오지를 다니며 경험한 유대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자였고, ‘Socialist Review’같은 좌파 잡지에 글을 썼다.(가디언, 16.8.3) 코스타리카 내전 종식의 공로로 1987년 노벨 평화상을 탄 오스카 아리아스 산체스(Oscar Arias Sanchez)가 대통령이 된 뒤 대통령 자문역으로서 코스타리카 교육시스템 근대화를 돕기도 했다.(childrenstech.com) 덴마크 완구기업 ‘레고’사와 협력해 저 유명한 레고 시리즈 ‘마인드스톰’을 개발했고, 89년에는 MIT 미디어랩 ‘레고석좌교수’가 됐다. 98년 그가 명예교수로 은퇴한 뒤 ‘레고-페퍼트 석좌교수’로 명칭이 바뀐 그의 자리는 레스닉이 물려받았다.

24년을 함께 산 그의 네 번째 아내 수젠느 매시(Suzanne Massie, 러시아 문학ㆍ문화이론가)와 함께 메인주 블루힐에 머물며 자신의 연구소(LBSPI)를 설립, 소년원 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을 펼쳤고, 메인 주 7,8학년 생 전원에게 랩탑컴퓨터를 지원토록 하는 사업을 주도했다. 2004년에는 네그로폰테, 케이 등과 함께 저개발국 아동 PC 보급사업을 위한 비영리단체 ‘OLPC One Laptop per Child’ 사업을 주도, 40여 개 국에 300만여 대의 저가 PC를 보급했다. 네그로폰테는 “그 모든 PC안에 페퍼트가 있다”는 말로 그의 공을 기렸다. 그는 구겐하임펠로십(1980) 등 다수의 상을 탔다.(news.mit.com)

페퍼트는 2006년 1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컨퍼런스에 참석했다가 모터바이크에 부딪쳐 한 달여 동안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맸고, 어렵사리 의식은 회복했지만 언어 능력 등을 온전히 되찾지는 못했다. 아내 매시는 “그의 꿈은 교육받지 못하는 세계 약 20억 명의 사람들을 교육받게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fortune.com)

하이퍼텍스트 등 인간과 PC의 인터페이스 연구의 기원을 연 컴퓨터 마우스의 발명가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 1925~2013)는 3년 전 별세했다. 마빈 민스키도 지난 1월 별세했다. 2차 대전 이후 컴퓨터 공학의 미답지를 일구며 21세기 컴퓨터 기반 문명의 기틀을 닦고 혁신을 선도한 이들이 그렇게 하나 둘 세상을 뜨고 있다. 딥 러닝 등 첨단의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의 내일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기 바쁜 컴퓨터 공학과 산업의 오늘은 지난 세월의 그들을 되돌아볼 겨를이 없어 보인다. 특히 한국에서 그는 부당하게 여겨질 만큼 무명이다. 사실 그는 정통 수학자도 아니고, 컴퓨터공학자도 아니고, 교육학계의 적통이라 보기도 애매하다. 그리고, 제도 교육의 개혁(revise)이 아닌 전복(invert)을 꿈꾸고 기계에 휘둘려선 안 된다는 그의 사상이, 진도 나가기 바쁜 학교와 산업의 입장에선 성가신 참견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다. 그의 교육 철학을 현장에서 적용하기란 무척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우선 교사가 없고, 그런 교사를 지지해줄 교감ㆍ교장이 드물 것이다. 레고의 마인드스톰 시리즈는 꿰고 있어도 페퍼트의 마인드스톰 철학은 들어본 이조차 드문 까닭이 또 그와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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