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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터널’ 하정우는 귓속말로 뭐라 했을까

입력
2016.08.1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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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널’속 터널 붕괴 사고 생존자 정수는 생수 2병과 케이크로 생명을 유지하며 휴대폰과 라디오 클래식 채널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쇼박스 제공
영화 ‘터널’속 터널 붕괴 사고 생존자 정수는 생수 2병과 케이크로 생명을 유지하며 휴대폰과 라디오 클래식 채널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쇼박스 제공

※스포일러 주의 (영화를 보신 분만 읽기를 강하게 권합니다).

영화 ‘터널’의 흥행 질주가 거침없습니다. 지난 10일 개봉과 동시에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라 16일까지 353만 3,443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았습니다. 김성훈 감독의 전작 ‘끝까지 간다’(2014)의 최종 관객수(345만305명)를 불과 1주일 만에 넘어섰습니다. 한 주 앞서 개봉한 ‘덕혜옹주’(410만 5,743명)도 조만간 추월할 기세입니다.

영화는 갑자기 무너진 터널에 갇힌 자동차 영업사원 정수(하정우)의 고군분투를 담아내며 거대한 재난 블록버스터와 다를 바 없는 한국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합니다. 재난 상황 점검보다 인증사진을 먼저 챙기는 관료들, 제대로 된 매뉴얼 하나 없는 구조현장, 구조의 손익을 따지는 정부와 기업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습니다. 현실에서 익히 보아온 장면들이기 때문일 겁니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터널’은 결코 현실을 비관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낙천적이기까지 하죠. 콘크리트 더미에 파묻힌 비좁은 자동차 안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주인공 정수 때문입니다.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해 하루하루 버텨 나가는 그의 모습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와 ‘마션’의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덕분에 영화엔 활기가 돌고 극장 안에선 웃음이 터집니다. 하정우가 평소 보여준 특유의 낙천성과 여유로움에 기댄 측면이 큽니다.

하정우는 무엇이 대사이고 무엇이 애드리브인지 모를 능청 연기를 펼쳐냅니다. 자문자답, 독백, 넋두리가 쉼 없이 쏟아지는 1인극을 보는 듯합니다. ‘하정우의, 하정우에 의한, 하정우를 위한 영화’라는 관객평이 과하지 않습니다.

하정우는 인터뷰에서 “캐릭터에 얽매이지 않고 매 순간 내가 느끼는 대로 표현하려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혼잣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수이자 하정우로서 느끼는 감정들이었겠지요.

우연히 또 다른 생존자 미나(남지현)의 존재를 알게 된 정수는 환풍기를 통로 삼아 두 자동차 사이를 오가며 미나를 돌봅니다. ‘환풍기 길’을 몇 차례 오간 뒤 자신의 차에 돌아온 정수가 가볍게 숨을 내쉬며 툭 내뱉습니다. “아, 집에 왔다.” 안도하는 표정마저 꼭 집에 돌아온 사람 같습니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유일하게 주파수가 잡히는 클래식 채널을 틀어놓고는 짐짓 느긋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클래식이라. 음… 나쁘지 않아. 마음의 안정도 주고.” 두 대사 모두 하정우의 애드리브였다고 합니다.

미나의 애견 탱이와의 호흡은 또 어떤가요. 마치 밀당처럼 아주 차지죠. 비상식량을 먹어 치운 탱이를 향해 육두문자를 속사포로 쏟아내던 정수는 건너편 미나가 무슨 일인지 묻자 황급히 “꿈꿨어요”라면서 얼버무리는데, 이 장면도 하정우의 즉흥 연기로 빚어졌습니다. 하정우와 탱이는 벌써 소문이 자자한 ‘개사료 먹방’도 합작했습니다.

영화 '터널'의 주인공 정수(하정우)는 개 탱이를 친구 삼아 터널 붕괴 사고라는 불행을 견뎌낸다. 쇼박스 제공
영화 '터널'의 주인공 정수(하정우)는 개 탱이를 친구 삼아 터널 붕괴 사고라는 불행을 견뎌낸다. 쇼박스 제공

영화에 드러나지 않은, 숨겨진 애드리브도 있습니다. 마침내 정수가 터널 밖으로 나오자 기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취재 경쟁을 벌입니다. 오랜 시간 고립돼 탈진한 정수는 눈을 안대로 가린 채 들것에 실려가다 구조대장 대경(오달수)을 불러 귓속말을 합니다. 입술을 떼는 것조차 힘겨운 상태에서 그가 한 말을 대경이 기자들과 정부 고위 관계자들에게 크게 대신 전하지요. “다 꺼져, 이 XXX들아.” 관객 입장에선 통쾌하고, 기자 입장에선 뜨끔한 대사였습니다.

언뜻 느끼기에는 구조작업에 애를 먹은 대경이 정수의 입을 빌려 본인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언론시사회 날 오달수에게 물어봤습니다. 대본에는 적혀 있지 않았을 그 귓속말이 무엇이냐고요. 하정우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사를 읊더랍니다. “내가 조선의 국모다.” 재촬영 땐 이렇게도 말했다는군요. “밥은 먹고 다니냐.” TV드라마 ‘명성황후’와 영화 ‘살인의 추억’의 명대사들이지요. 천하의 오달수도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합니다. 영화에는 오달수가 하정우의 장난과 넉살에 피식 웃는 모습이 그대로 담겼습니다. 귓속말 장면이 등장할 때 눈을 크게 뜨면, 무음으로 담긴 하정우의 대사가 “내가 조선의 국모다”인지, 아니면 “밥은 먹고 다니냐”인지,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붕괴된 터널 세트에서 대부분의 촬영을 해야만 했던 하정우는 스스로 조금 예민했다고 말합니다. 눈 앞에 카메라와 스태프가 보이면, 정수의 고립감과 외로움을 온전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연기를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스태프나 카메라에 가는 것도 경계해야 했고요. 워낙 공간이 좁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하정우의 몰입을 위해 카메라는 철저히 존재를 감췄습니다. 무너진 콘크리트 사이의 틈을 활용해 하정우를 담아냈습니다. 조명도 자동차 실내등, 휴대폰 플래시, 손전등을 활용했다고 합니다. 하정우가 실제 자신의 모습인지 캐릭터 연기인지 모를 자연스러운 연기로 관객들을 매료시킨 데는 이런 노력이 숨겨져 있었던 겁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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