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를 정치 이념으로 정립한 이는 미국 독립선언문 초안 작성자이자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제퍼슨의 꿈은 부와 출생에 뿌리를 둔 귀족이 사회를 주도했던 구대륙 유럽과 달리 재능과 천재성에 근거한 귀족이 등장할 수 있는 나라를 신대륙에 세우는 데 있었다. 재능 있는 이가 노력을 기울이면 누구나 엘리트인 ‘자연적 귀족’이 될 수 있다는 게 제퍼슨의 능력주의였다. ‘아메리칸 드림’의 역사적·철학적 기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능력주의에는 빛과 그늘이 존재한다.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는 개인의 잠재력을 중시하는 근대 능력주의는 중세 신분사회 질서를 무너뜨린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미국은 이 능력주의가 화려하게 꽃핀 ‘기회의 땅’이었다. 양초제조업자 아들인 벤저민 프랭클린에서 아칸소주 촌뜨기인 빌 클린턴에 이르기까지 연줄과 배경이 아니라 성실과 교육이 성공의 핵심 요소라는 믿음은 미국 사회를 지탱해온 기본 가치였다.

역설적인 것은, 능력주의가 개인의 경쟁력을 무엇보다 앞세운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 시대에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회가 재능과 경쟁력을 강조하면 할수록 능력 있는 소수와 그렇지 않은 다수 간의 계급 격차가 커졌다. 미국의 경우 1930년대에는 국민의 50%가, 1960년대에는 30%가 국가의 부를 통제했지만, 최근에는 국민의 10%가 국부(國富)를 좌지우지한다. 또, 능력에 따른 경쟁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소수를 제외한 다수로 하여금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이 말한 ‘무용지물(uselessness)’이라는 무력감을 갖게 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한 ‘잉여’로서의 ‘쓰레기가 되는 삶’에 대한 자각은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의 그늘을 이뤘다.

정말 역설적인 것은, 21세기 현재 능력주의가 자신이 몰아내려 했던 세습주의로부터 공격받고 있다는 점이다. 능력이 아니라 태생에 따라 사회적 계층화가 이뤄지는 ‘신(新)세습사회’의 도래는 이제 지구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선진국의 ‘세습 자본주의’ 경향을 통계적으로 입증한 이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라면, 우리나라의 경향을 금수저와 흙수저 등 사회적 풍자 담론으로 제시한 게 ‘수저계급론’이다.

신세습사회론인 수저계급론에 대해선 일각에서 반론이 제기됐다. 개인적 책임을 모두 사회적 책임으로 돌린다는 게 핵심 논리였다. 자기 능력을 계발하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은 채 사회구조와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을 일방적으로 토로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론은 부자에 대한 시기심과 상대적 박탈감이 수저계급론에 깔려 있다고 비판했다.

사회학을 공부하는 내가 보기에 젊은 세대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게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각종 스펙 쌓기에서 볼 수 있듯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막막한 현실이 신세습사회론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무리 ‘노오력’을 기울여도 취업하기 어려운 게 흙수저의 삶이라는 젊은 세대의 주장이 현실에 훨씬 더 가깝다. 기성세대의 ‘노력’과 청년 세대의 ‘노오력’ 간 인식의 거리는 우리 사회 세대 단절 및 긴장의 단적인 징표다.

분명한 것은, 사라져 가는 계층 사다리를 다시 세우지 않고선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점이다.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들은 이미 다각도로 제시돼 왔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많은 교육 기회를 부여하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노동시장을 개혁하며, 소득과 자산·상속에 대한 전향적인 조세정책을 강구하고, 좌절한 이들을 위한 패자부활 제도를 마련하는 게 그 대안들이다.

자, 이제 이 글을 왜 썼는지를 밝혀야 할 듯하다. 지난 한 주 동안 한 교육부 고위 공무원의 발언이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는 말이었다. 계층 사다리를 재구축하는 데 핵심 수단이 돼야 할 교육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교육부 관리의 입을 통해 그런 발언이 나온 사회는 이미 막장까지 간 사회가 아닐까. 선진국에로의 진입은커녕 전근대 세습사회로 퇴행하는 현실을 지켜보는 마음 더없이 안타깝고 참담하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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