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이나미 칼럼] 사고의 편향성을 넘어

입력
2016.07.07 14:09
0 0

얼마 전 몹시 붐비는 전철에서 겪었던 일이다. 뒷사람이 미는 바람에, 서 있는 내가 메고 있던 가방이 앞에 앉아서 핸드폰을 하고 있던 딸 또래 아가씨의 시야를 막게 되었다. 아가씨는 짜증을 내며 가방을 세게 밀었다. 깜짝 놀란 나는 뒷사람 때문이라며 변명을 하니 아가씨는 오히려 소리를 높이며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였다. 어쨌거나 민망한 마음에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서둘러 상황을 마무리했으나, 두고두고 불쾌함이 남는 일이었다. 아랫사람한테는 거친 욕을 해도 순종적으로 예, 예,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노인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나이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젊은 사람들의 기세에 눌려 고개를 숙여야 한다니. 자괴감도 들었다. 베이비부머 입장에서는 노후를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팔구십이 되어버린 부모 부양과 학비를 갚기는커녕 독립조차 요원한 자녀를 책임지느라 어깨가 무겁다. 청춘은 아프고, 노인은 서럽다면, 중년은 힘들다, 라고 해야 할까. 물론 나이에 따른 이와 같은 일반화는 매우 자의적인 구분이고, 시간 공간 사람에 따라 수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세대 간의 갈등은 사실 공자 이전 시대에도 버릇없는 젊은이들을 꾸짖고 세상의 앞날을 걱정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차곡차곡 연륜이 싸이면 저절로 존경받는 농경시대와 달리, 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시대라,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한 사람의 능력과는 거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연륜이 있으면 대접받는 과거의 추억에 매달리는 것뿐이고, 젊은 사람들은 그런 구태의연한 관습 때문에 자신들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 못 하고, 대우도 정당하게 받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입장이 상대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비단 나이뿐 아니라, 재산, 학력, 지위 등 모든 조건에 다 해당이 될 것이다. 예컨대 나보다 별로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이 생각되는데도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동적으로 이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며 정의로운 사회주의를 주장하게 된다. 반면에 나보다 좀 못해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들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아니면서 노력을 하지 않아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며 함부로 재단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자처럼 생각한다. 나이 많은 선배들의 온갖 심부름을 다 해야 하는 젊은 시절은 다 잊어버리고 막상 더 젊은 후배가 들어오면 못살게 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 뒷간 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속담도 생겼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나를 불쾌하게 한 젊은 여성의 머리에는 어쩌면 나와는 전혀 다른 시나리오가 입력되어 있을 것이다.

관찰자의 좌표나 운동 조건에 따라 관찰당하는 물체의 좌표나 운동 역시 다르게 보인다는 상대성 이론과 비슷하다 할까. 세상의 어떤 현실이나 이론도 나의 ‘주관적 상황에 의한 자의적 판단’이 완전히 배제될 수 없기 때문에 오류 없는 절대적 정의는 없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상대주의라는 프레임에 넣고 아무것도 안 하는 무기력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행동 관찰자의 주관성이 가진 자의성과 편향성이 객관적 상황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때로는 극단적인 파괴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자는 뜻이다. 영국을 포함한 북유럽과 미국의 고립주의, 중동의 테러리즘, 일본이나 중국의 국수주의 같은 것들도 따지고 보면 상황의 상대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코 앞의 이익만 따지는 주관적 편견의 소산이다. (지구촌 상황이 이렇다 보니, 헬조선이니, 귀신섬 대만이니, 하는 말들이 있어도 한국이나 대만의 젊은이들이 편하게 나가 살 곳도 실은 거의 없다.)

나와 다른 것을 믿고, 다른 기억을 가진 이들에 대한 이해와 포용의 폭이 더 넓어지면 그만큼 내 의식도 확장이 될 것이다. 국가뿐 아니라 모든 집단이 서로 그런 화해와 포용의 태도를 보인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융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심성을 좌우하는 무의식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성의 영역을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외모, 나이, 지위, 재산 등등 자신의 겉모습이 일종의 가면이자 껍데기, 즉 페르소나(Persona)일 뿐이라 사람들이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 더 큰 자기(Self)를 찾는 개성화 과정을 추구한다면 훨씬 더 이 세상은 살만해 질 것이라 믿는다.

세대 간, 계층 간, 분쟁이 있을 때 이를 현명하게 해결하고 중재해 주는 현자는 없고, 적이 될 상대방은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원시적 인간과, 오로지 0과 1로만 이루어진 이진법의 극단적 기계인간만 넘쳐난다. 인공지능보다 우월한 영역이 공감과 상상력일진대.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살다 보면 결국 진화의 종말로 치닫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나미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