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또 화를 냈다. 내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부엌살림을 다 끄집어내고 어지럽히더니 급기야 식탁 위로 올라간 것이다. “얼른 내려와.”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았지만 아이는 오히려 방방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휘청하고 떨어지려는 순간 가까스로 잡아 세웠다. 인내심이 바닥나 있던 나는 결국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얼마 전 어린이집 상담을 다녀온 후로 아이에게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담임선생님은 단적으로 말해 아들을 ‘힘든 아이’라고 표현하셨다. 주의가 산만하고 고집이 세서 여러 아이를 같이 돌보는 선생님 입장에서는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들의 그런 기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운이 빠졌다. 특히 이유 없이 블록을 던지거나 문을 막고 서서 안에 있는 친구를 못 나오게 한다는 소리를 듣자 표정관리가 힘들어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자책감이 밀려왔다. 내가 사랑 표현을 많이 안 해줘서 애정결핍 상태인가, 나의 놀이 방식에 문제가 있나, 아니면 훈육방법이 잘못 됐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기반성의 피로 때문인지 그날 이후 아이의 잘못에 더 예민해졌다.

그러고 보니 ‘자책’은 엄마들의 숙명인가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엄마들의 ‘내 탓이오’ 하는 감정은 아이가 커가면서 종류와 횟수가 늘어만 간다. 신생아 시절에는 내가 남들보다 모유량이 적어서 아이가 울면 애꿎은 가슴을 탓했다. 걸음마를 배울 때는 아이가 넘어질 때마다 나의 부주의를 원망했고, 밥을 뱉어내면 내 요리 솜씨가 문제인가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아플 때면 자책감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렇게 모든 문제의 원인을 엄마인 내 안에서 찾았다. 엄마뿐 아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엄마를 쳐다본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역시 아이를 낳기 전에는 육아프로그램을 보면서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이가 이상하면 그건 다 엄마 탓이야.”

안팎에서 문제의 원인을 엄마라고 하는 통에 엄마들은 자기반성의 늪에서 빠져나올 틈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아이의 엄마인 까닭에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지금 나의 아이가 세상 밖에 나온 지 불과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이는 낯선 세상에 내던져진 불완전한 존재다. 모든 게 서투르니 문제가 끊임없이 터지기 마련이다. 걸음마, 숟가락질, 친구와 같이 노는 법, 울음을 참는 법,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는 터득하는 데 시간이 걸리며 그 과정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아이가 자주 아픈 이유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병균과 싸워 이겨낼 힘을 기르려면 자주 아플 수밖에 없다. 친구들과 싸우지 않고 잘 지내길 바라기에도 아직 이르다. 아이는 만 3세가 넘어서야 처음으로 같이 노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러니 엄마 탓이 아니다. 아직 아이인 탓이다. 아이라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와 엄마는 매일 맞닥뜨려야 하는데 이를 모두 내 탓으로 돌리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니 이제 그만 자책해도 좋다.

올해 초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는 마치 동굴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나와 같은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과 만나면서 육아 스트레스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위로를 주고받는 육아 동지들과 놀이터에서 만날 기회가 생겼다. 다들 어린이집 상담이 끝나고 각기 다른 고민을 하는 모양이었다. 듣고 보니 지난 며칠간 나를 힘들게 했던 문제가 비단 나만의, 내 아이만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자책감의 늪에서 살짝 빠져나왔다. 마침 아들이 미끄럼틀에서 놀다가 친구와 싸우며 운다. 제지하려고 다가서는데 어느새 다시 웃으며 같이 논다. 마음이 놓였다. 그제야 내 아이가 26개월짜리 꼬맹이로 보였다.

이정미 전업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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