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층에 만연한 ‘책임 떠넘기기’ 풍조
구의역, 강남역 사건도 개인차원 몰아가
대통령, 정부부터 ‘내탓이오’ 외치기를

지난해 메르스 사태 초기 낙타가 졸지에 ‘사악한 동물’ 취급을 받았다. 낙타를 감염원으로 지목한 정부가 ‘낙타와 접촉 피하기’‘낙타고기 먹지 말기’등의 예방법을 배포한 때문이다. 국내에 있는 낙타가 수십 마리에 불과하고 모두 동물원에 수용돼 있는 데다 중동산도 아닌 데도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 정부의 무능한 대처를 핑계 삼기에는 말 못하는 동물이 제격이었던 셈이다.

이번에는 고등어가 날벼락을 맞았다. 직화 조리 시 미세먼지가 발생한다는 이유로 고등어, 삼겹살 등의 식당 규제 방안이 미세먼지 대책으로 거론됐다. 고기구이 집과 찜질방 등 숯을 사용해 발생하는 미세먼지 비중은 1%에 불과하다. 정작 미세먼지의 주범인 화력발전소와 경유차는 못 잡고 애먼 서민 음식만 탓한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게 당연하다.

경유차만 해도 그렇다. 정부는 2009년 ‘클린 디젤’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경유차를 친환경자동차라고 선전하며 구매를 부추겼다. 각종 혜택을 쏟아내면서 장려한 결과 경유차 비중이 치솟아 지난해 절반이 넘었다. 그러더니 몇 년 만에 경유차가 미세먼지 주범이라며 경유값을 올리느니, 부담금을 폐지하느니 하며 난리법석이다. 일본이 10년 전부터 ‘디젤차 NO 정책’을 펴 미세먼지 문제를 상당히 해결한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적이다. 정부는 엊그제 발표한 미세먼지 대책에서 ‘클린 디젤’ 정책을 슬그머니 폐기하고도 일언반구 해명도 하지 않았다.

반성과 사과 없이 남 탓만 하기로는 박근혜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박 대통령은 걸핏하면 국회와 야당이 경제를 망치고 있다며 반복해서 공격했다. 경제ㆍ민생법안을 처리해주지 않아 경제가 망가진다는 프레임을 형성하려 안간힘을 썼다. 법안 몇 개 통과된다고 당장 기업이 살아나고 일자리가 무더기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만큼 국민들은 어리석지 않다. 그 걸 보여준 게 4ㆍ13총선에서의 여당 참패다.

박 대통령은 그런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야당에 표를 몰아준 유권자를 탓하고, 선거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새누리당을 탓하고, 의석 수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 참모를 탓하고 있을 것이다. 국회가 열심히 일을 하겠다며 만든 ‘상시청문회법’에 대해서도 판에 박은 국회 탓 타령이다. “위헌 소지가 있다”느니 “국정 및 기업 등에 과중한 부담을 줄 우려가 있다”는 등의 터무니 없는 이유를 대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무능한 박근혜 정부의 ‘남 탓’은 권력기관으로 전염이 된 듯하다. 서울메트로 측이 구의역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 책임을 19세 수리공 개인에게 돌리려 한 것도 기득권층에 만연한 ‘책임 떠넘기기’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고가 수리공의 개인 휴대전화 사용 때문으로 밝혀졌다”는 언론의 오보나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 모른다”는 안철수 국민의 당 대표의 트위터 글도 같은 현상이다.

강남역 공중화장실 살인사건에서 경찰도 책임 회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 여성혐오 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 ‘묻지마 범죄’로 규정하고 모든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고 갔다. 그 후 무차별적으로 시민을 폭행하고 살해하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해 ‘묻지마 범죄’에 대한 경찰의 치안부재 질타가 쏟아지자 이젠 “묻지마로 볼 수 없다”고 딴소리다.

심리학자 브리기테 로저는 ‘핑계의 심리학’에서 “어떤 일에 이유를 대거나 정당화시키면서 진실을 왜곡하려고 할 때 의식적으로 핑계를 늘어놓는다”고 했다. 책임과 비난, 처벌을 모면하고자 자신의 무죄를 핑계로 입증한다는 것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1989년 정치권과 권력층이 서로 “네 탓”만 외치며 갈등을 부채질하자 ‘내탓이오’ 캠페인을 벌였다. 이 캠페인은 한때 나라 전체로 확산됐지만 지금은 시들해졌다. 책임과 의무를 지려하지 않고 자기 반성이 없는 요즈음 그런 인식이 아쉽다. 부질없는 당부지만 대통령과 정부부터 먼저 실행에 나서면 어떨까 싶다. 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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