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쪽짜리 준비서면이 재판 임박해서 제출되면 판사가 무슨 수로 다 읽겠습니까. 법정에서 짜증만 나지요.” 최근 대법원 관계자가 국내 연 매출액 기준 5위권인 A 법무법인(로펌)이 지난해 1월 낸 준비서면 뭉치를 보여주고는 꺼낸 말입니다. A 로펌은 불법대출을 해준 W 저축은행 대표이사와 임원 등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주주들의 상법상 대표소송 사건에서 피고를 대리하며 295쪽, 296쪽, 133쪽 등 방대한 준비서면을 여러 번 내면서 재판부를 난처하게 했습니다. 2014년 5월 접수된 이 사건은 2년 넘게 1심에 걸려 있습니다.

많게는 수백 건의 사건을 쌓아둔 판사가 한 사건의 한 쪽 변호사가 300쪽 가량의 준비서면을 내면 제대로 읽지도 못해 쟁점을 꿰지도 못하고 법정에 들어간다는 게 법원이 털어놓는 속사정입니다. “준비서면이 두꺼울수록 (재판) 전날 제출되는 일이 다반사다. 판사가 재판 내용을 잘 모를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대형 로펌 변호사들은 앞서 낸 서류들을 일부 변경된 사항들만 고쳐서 또 낸다. 서류만 쌓이면서 재판만 지연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불법대출로 저축은행에 손해를 끼친 대표와 임원들에게 주주들이 책임을 묻는 한 민사소송에서 원ㆍ피고 양 쪽이 제출한 방대한 준비서면들. 주로 대형 로펌들이 3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준비서면을 수 차례 냈다. 대법원 제공

이에 대법원이 중복되고 과다한 분량의 서면을 내는 ‘서면 폭탄’ 변론 행태에 제동을 걸기로 했습니다. 특히, 대형 로펌을 주범으로 지목했습니다. 대법원은 지난 1일자 보도자료에서 “대법원의 심리 역량이 상고이유서 평균 분량(17쪽)을 대폭 초과하는 일부 대형 로펌들의 사건에 불필요하게 집중되면서 사법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크게 저해되고 있는 현실”이라고 밝혔습니다. 70쪽을 넘기는 사건의 대리인은 대부분 대형 로펌이며, 실제로 72~138쪽의 상고이유서를 낸 대형 로펌 4곳의 사건 7건을 대표적 예로 들었습니다. 대법원까지 간 사건뿐만 아니라 1ㆍ2심에서도 대부분 대형 로펌이 방대한 양의 서면 제출에 앞장 선다는 게 다수 법조인들의 얘기입니다.

대법원이 내놓은 대책은 이렇습니다. 민사소송(가사ㆍ행정소송 포함)에 한해 원고의 소장과 피고의 답변서는 서로의 쟁점들을 분량에 제한 없이 내도록 하되, 추가로 내는 준비서면이나 대법원에 내는 상고이유서와 답변서 등은 30쪽을 넘기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을 민사소송규칙에 새로 넣겠다는 겁니다. 입법 예고한 개정안대로라면, 재판부와 합의된 경우가 아닌 한 재판장은 “30쪽 이내로 줄여 제출하라”고 명할 수 있고, 앞서 낸 서면과 겹치는 내용을 또 내지 못하도록 주문할 수 있습니다. 공정거래사건이나 특허사건 등 사실관계나 법리 다툼이 까다로운 일부 사건을 빼면 30쪽 안에 쟁점 정리를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게 법원 안팎의 얘기입니다. 대법원은 자료에서 “법정 중심의 재판다운 재판을 하기 위해” “1심의 집중심리와 2ㆍ3심의 신속하고 효율적 운용을 위해”라고 취지를 밝혔습니다.

변호사들, 주로 대형 로펌에서 어지간한 장편소설 한 권쯤 되는 200~300쪽 준비서면을 내기 시작한 것은 전자소송이 도입된 2011년 5월 이후라고 합니다. 한 재경법원 부장판사는 “종이로 내면 두께가 한 눈에 보이니 변호사들이 재판부 눈치도 좀 봤는데 전자소송 도입 뒤 중복되는 내용도 아랑곳 않고 복사ㆍ붙여넣기를 하고 있다”며 “인터넷 검색 내용과 논문을 그대로 긁어다 내기도 하는데, 보는 자체가 곤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대형 로펌) 양 쪽이 총 2,000쪽 분량의 준비서면 등을 냈는데 각자 이미 낸 자료와 상당히 중복되는 내용들이 많았다”며 “이는 ‘서면 테러’다. 판사가 머릿속에 정리가 되겠느냐”고까지 했습니다. 재야에 있던 한 대법관도 “몸집 큰 곳의 쪽수 늘리기 때문에 변호사로 있을 때 (맞춰 가느라) 엄청 고생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대한변호사협회장을 비롯한 다수 법조인들은 대법원의 ‘30쪽 제한’방침이 옳은 방향이라고 봅니다. 대형 로펌을 꽤나 상대해 본 Y 로펌 소속 H 변호사는 “대형 로펌들은 때때로 준비서면을 100장 이상 왕창 써 내며 쟁점을 흐리는 전략으로 재판을 지연시키기도 한다”며 “상대가 많이 써 내니 나도 의뢰인 눈치 보며 억지로 길게 늘려 쓰면서도 뭘 쓰는지 모르고 변죽만 울릴 때도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러면서 “상대가 20장이면 될 서면을 100장 써 내면 변호사들은 더 보고 쓰는 시간에 대해 추가 비용을 요구하게 돼 결국 의뢰인의 소송비용 부담으로 돌아가는 문제가 있는데 이를 바로잡을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변호사 없이 ‘나홀로 소송’을 벌이는 이들이 대형 로펌들을 상대로 반박하는 데 분량 제한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대형 로펌들조차도 내심으로는 반기는 눈치입니다. B 로펌의 K 변호사는 “(선뜻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이라며 “사실 상대방이 길게 써내서 우리도 길게 냈을 뿐”이라고 환영했습니다. C 로펌의 N 변호사, L 변호사도 “송무변호사 회의에서 설명하고 (30쪽 이내 서면 등 제출이) 준수되고 있는지 매달 확인하겠다”고 협조하겠단 뜻을 밝혔습니다. “주니어 변호사들이 좋아하겠다”고도 했습니다. 대개 로펌에서 서면 준비 작업은 월급쟁이인 젊은 변호사들 몫이기 때문에 30쪽 기준이 생기면 밥 먹듯 하는 야근도 줄어들 여지가 크기 때문입니다. 두 변호사는 그러면서 “우리 로펌은 민사사건에 시간당 수당(타임차지)를 적용하지 않아서 별 문제 없다”고 말했습니다. 타임차지를 받는 K 법률사무소의 송무 책임자도 “준비서면 작성 등과 관련해 시간 좀 줄어든다고 수입이 곧장 줄어든다고 볼 수는 없다”며 반대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법원은 서면의 분량 제한을 추진하면서도 변론권 침해 우려를 고려해 서면 제출 횟수까진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되레 대형 로펌 변호사들이 “보충 상고이유서 제출 횟수 제한 규정을 신설해 달라”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강용현 한국민사소송법학회장도 “이렇게 되면 변호사들도 편할 것이다. 옳은 방향”이라면서 “다만, 공정거래나 특허사건은 30쪽 안에 쓰기가 쉽진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해외에선 이미 서면 분량 제한을 걸고 있습니다. 미국은 항소인의 서면을 30쪽(1만4,000단어)으로, 상고허가신청서를 40쪽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두고 있으며, 영국도 항소심의 경우 준비서면은 25쪽을 넘기지 못하도록 합니다.

대법원의 분량 제한 추진으로 법원은 “판사가 기록을 제대로 안 봐서 내가 졌다”고, 변호사는 “당신이 상대 변호사에 비해 성의 없게 적게 써내서 불리해졌다”고 소송 당사자들에게 욕 먹는 일이 점차 사라질지 주목됩니다. 법원과 변호사들은 쓸데 없는 업무 부담을 덜고 효율적인 재판을 해나가야 하며, 억울해서 소송까지 하는 국민들은 서류의 양으로 불필요한 소송 비용을 더 내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서울법원종합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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