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대학에서 사회란 무엇인지를 가르쳐온 지 25년이 되건만, 우리 사회가 1997년 외환위기 시기를 제외하고 요즘처럼 우울한 시절도 없다. 소중한 젊은 목숨들이 강남역과 구의역에서 제대로 꽃피워 보지도 못한 채 무참히 죽어갔다. 누구는 이런 일이 새로운 게 아니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조현병자의 살인 사건이나 지하철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 사망 사고가 처음 일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건에 대한 사회적 슬픔과 분노가 대단히 크다. 왜일까.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살해당한 여성이나 목숨 잃은 청년이 결코 적지 않은 이들에게 나 자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남은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둘째,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됐는데도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국민과 시민의 생명을 얼마나 존중하는 걸까. 결국 포스트잇을 붙여 슬픔에 동참하고 분노를 표출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고, 그 절망감은 다시 더 깊은 슬픔과 분노를 낳고 있다.

주목할 것은, 추모하기 위해 강남역을 찾은 이들의 다수가 젊은 여성이었다면 구의역을 찾은 적지 않은 이들은 젊은 비정규직이라는 점이다. 여성, 비정규직, 그리고 젊은 세대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다. 누구는 여성과 젊은 세대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의 주관적 자기 인식이다. 양성불평등과 청년실업 통계를 보더라도 이들의 자기 인식에는 객관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두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라는 공감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추모가 일상화됐고, 동시에 추모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절망감이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이다. ‘분노사회’ ‘헬조선’ ‘각자도생’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등 우리 사회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말들은 이 절망감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지난해 12월 청년 1,000명(20~34세)을 대상으로 경향신문이 조사한 자료를 보면, ‘이생망’을 생각해본 적 있다고 응답한 이들은 41.3%였고, 다음 생에 성(性)을 바꾸고 싶다는 사람의 86.4%는 여성이었다.

사회적 약자들이 느끼는 이런 절망감은 사회의 존재 이유를 묻고 있다. ‘사회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는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였다. 대처는 사회란 본래 부재하고 개인과 가족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해 사적 영역의 책임성을 강조했다. 이런 대처의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는 분명 존재한다. 구성원 모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구성원들 사이에 계약을 맺은 게 사회라는 공동체라고 가르쳐 왔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이 사회가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것은 두 가지다. 구성원 가운데 약자들의 보호가 사회에 부여된 도덕적 책임이라는 게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사회가 자신의 의사결정권을 정부와 의회로 이뤄진 국가에게 맡긴다는 점이다. 내가 느끼는 아이러니는, 아이러니를 넘어서 갖는 서글픔은, 대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이 우리나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사회 없는 사회’를 더 이상 이렇게 놓아둘 순 없다. 사회는 약육강식의 사냥터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다.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일궈나가기 위해선 전국적 차원이든 지역적 차원이든 정부와 국회 또는 의회가 약자 보호라는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양성평등을 이룰 수 있는 제도적·문화적 혁신을 서두르고,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의 외주화를 철저히 금지시켜야 한다.

슬픔과 분노를 통해 국민 다수가 사회의 존재 이유를 물었다면, 이젠 사회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국가가 정책과 대안으로 이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국민과 시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그런 국가는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 죽어야 했던 두 젊은이의 명복을 빈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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