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국 가톨릭대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최근 강남역 인근, 다중이 이용하는 건물 노래방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은 피의자가 여성에 대해 피해망상이 심한 상태였고,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별다른 범죄 촉발이 없다면서 정신질환에 의한 ‘묻지마 살인범죄’라고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은 ‘묻지마 범죄’로 사건을 마무리 하려 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정신질환자의 범죄라고 결론짓기 전에 더 많은 것을 묻고 싶다.

범죄발생 개연성이 부족한 범죄는 ‘내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는 집단적 불안의식을 유발한다. 남에게 원한을 살만한 일도 하지 않고 살아도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면 대중은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 가해자에 대한 집단적 공분을 표출한다. 집단적 공분은 사건 전반에 관한 객관적 고찰과 대책보다 단순하고 또 다른 파괴적 대책을 유발시킨다.

이미 대중은 ‘묻지마 범죄’의 잠재적 가해자, 즉 피의자가 앓고 있다는 조현병 환자들을 사회에서 격리하자는 단순하고도 파괴적인 대책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설사, 피의자가 조현병 환자임이 의심돼도 그가 왜 이런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는지 따져봐야 한다. 실제 조현병 환자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빈도가 낮은 점을 감안하면 이번 사건을 단순히 정신질환자의 범죄행위로 일반화한 것은 명확한 오류다.

피의자의 경우 아동청소년기부터 이상행동 등으로 사회적응 문제가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학교와 지역사회는 조기에 치료와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2008년 이후 4차례나 정신과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범죄를 저질렀다. 이번 사건은 사회안전망 구축 관점에서 국내 정신보건체계를 점검해야 할 숙제를 남겼지만 그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는다.

한국의 1인당 정신보건지출은 영국, 미국 등 선진국의 15% 정도 수준에 불고하다. 보건예산 대비 정신보건예산비율 또한 1.9% 로 WHO 최소 권고기준인 5%에 턱없이 모자란다. 약물치료와 사례관리를 통해 무난히 지역사회에서 이웃으로 살 수 있는 조현병 환자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내물릴 수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묻지마 범죄는 또한 정신질환보다는 오히려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분노범죄처럼 급작스런 사회경제적 환경 붕괴나 반복적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인한 인격붕괴 등 사회, 경제, 문화적 현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갑질 논란, 감정노동, 데이트폭력, 아동학대, 보복운전, 혐오범죄 등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일상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다수가 소수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이런 현상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또 다른 분노가 양산돼 결국 묻지마 범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갑과 다수의 폭력과 횡포를 제한하고, 을과 소수의 소진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 우리 사회 ‘분노조절력’과 ‘회복력’을 향상 시켜야 한다. 하지만 마음 성장, 마음 돌봄, 즉 정신건강의 가치를 우선시하지 않는 제도개선으로는 묻지마 범죄를 예방할 수 없다. 묻지마 범죄일수록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묻고, 알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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