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을 걷다(9) 을지로 3ㆍ4가

공구ㆍ타일ㆍ조명거리… ‘산업화 과정’ 그대로 간직
영화 ‘도둑들’ ‘감시자들’도 독특한 분위기 담아 가
요즘은 청춘들이 꿈을 찾아 모여드는 그 곳

서울은 자연 경관이 수려하다. 옛 역사의 흔적과, 반대로 첨단의 상징물 또한 많다. 그러다 보니 자연 경관이 그저 그렇거나 오래된 역사도 첨단 문명도 아니면 소홀한 대접을 받기 십상이다. 을지로가 딱 그렇다. 물건을 사거나 음식을 먹으려는 등의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굳이 구경하겠다고 찾아나서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을지로 3ㆍ4가 큰 도로 옆의 특화 상가와 그 사이사이 좁은 골목에는 현대 산업화 과정을 간직한 귀한 공간이 가득하다. 세련된 21세기형 산업은 아닐지라도 수십 년 전부터 이어진 아날로그형 산업이 모여 있다. 그 일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못 만드는 것 없다는 도심산업의 메카

을지로 3ㆍ4가는 도심산업이 모인 곳이다. 하는 일이나 다루는 재료가 겹칠 수 있지만 가게 간판에 씌어있는 업종만 열거해도 공구, 조명, 미싱, 타일도기, 조각, 가구, 인쇄, 기계, 페인트, 금고, 철망, 수도꼭지, 손잡이, 변기, 세면대, 볼트, 금형 제작, 전기, 알루미늄, 앵글, 용접, 선반, 절단, 파이프, 고무, 접착제, 주물, 열쇠, 아크릴 등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눈에 띈 것만 이 정도니 실제로는 훨씬 많은 가게와 공장이 있을 것이다. 골목 간판만 읽어도 흥미진진한 발걸음이 될 수 있다.

누구는 타일ㆍ도기 특화 거리, 조명 특화 거리, 공구 특화 거리, 조각 특화 거리, 미싱 특화 거리 등으로 구분하지만 대체로 큰 길 옆에는 타일ㆍ도기 가게와 조명 가게가 많고 골목에는 공구 가게와 조각금형 가게가 많다.

을지로3가 큰 길 옆에 있는 타일 가게. 이곳에는 형형색색의 타일과, 세면대 변기 등 위생도기를 판매하는 가게가 모여있다.

그 중 타일, 세면대, 변기 등을 파는 타일ㆍ도기 가게는 140여 군데 정도 된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폐허가 된 주택을 고치는 데 필요한 물건을 판매하는 상점이 모여 지금처럼 됐다.

조명 가게는 210군데 정도 된다. 전성기였던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현금을 허리에 찬 실내장식업자와 건축업자가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요즘은 한결 세련된 LED 조명기구를 많이 판매한다.

을지로 4가의 조명 가게. 이 일대의 조명 가게는 한 때 실내장식업자와 건축업자가 허리에 현금을 차고 몰려왔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공구 가게는 청계천 수표교와 관수교 구간의 남단에 모여 있다. 온갖 공구를 다 판매할 뿐 아니라 도면 하나면 그 자리에서 부품을 깎아 물건을 만들어준다고 한다. 설계도만 주면 탱크도 제작해준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니 을지로의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조각금형 점포도 360여 개나 있다. 과거에는 수작업으로 금형을 만들어 제품을 찍어냈지만 지금은 3D 프린팅을 활용한 금형 설계도 많이 한다.

골목에서는 페인트로 대충 써놓은 낯선 단어가 눈에 띈다. 그 중 ‘빠우’는 금속의 표면을 연마제로 문질러 광택을 내는 작업이고, ‘빠킹’은 패킹 즉 이음새나 틈새를 메워 물이나 공기가 새지 않도록 하는 장치를 말한다. 일본어로 눌러서 짜는 것을 뜻하는 ‘시보리’는 원형 금속판을 회전시키며 도구로 눌러 모양을 만드는 작업이다.

여러 일을 하는 곳이다 보니 거리와 골목은 짐수레나 자전거로 물건을 싣고 나르는 사람들로 늘 분주하다. 마스크와 보안경을 끼고 용접이나 절단 작업을 하는 작업자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일터로 시킨 음식을 앞에 놓고 러닝 셔츠 차림으로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른 저녁을 먹는 모습이 정겹다. 그 옆에서는 한 남자가 늦은 작업을 위해 서둘러 저녁을 먹은 뒤 골목에서 이를 닦고 있고 또 다른 골목에서는 일을 끝낸 아저씨가 세숫대야 물로 얼굴을 씻고 있다. 조금 여유 있게 하루를 마친 남자들이 테이블에 모여 화투를 치며 농담을 주고 받는데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독특한 분위기의 동네인 만큼 영화의 배경으로도 제격이어서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를, 최동훈 감독이 ‘도둑들’을, 조의석ㆍ김병서 감독이 ‘감시자들’을 여기서 촬영했다.

을지로 4가의 골목 안 작은 공장에서 한 작업자가 용접을 하고 있다.
하루 일을 마친 남자가 작업장 앞에서 세숫대야 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 있다.
을지로 4가 조각특화거리의 골목. 저녁 시간이라 낮보다 사람이 적다.
을지로 4가 골목의 작은 건물 안. 이제 막 일을 마친 이른 저녁의 모습이다.
● 이름난 노포, 노가리 골목의 맥줏집

을지로는 동네가 낡은데다 공장도 많기 때문에 얼핏 삭막해 보인다. 그러나 잘 뒤져보면 이곳만큼 맛난 음식점이 많은 곳도 없다. 맛과 가격 모두 만족스러운 원조녹두집, 양과 대창으로 유명한 양미옥, 등심과 찌개 맛이 일품인 통일집, 설렁탕으로 알려진 이남장, 군만두가 맛있는 오구반점, 실향민의 애환을 풀어주는 평양냉면 전문점 을지면옥, 돼지갈비 맛이 일품인 안성집, 순댓국과 머리고기가 맛있는 전통아바이순대 등이 모두 을지로 3ㆍ4가에 있다. 골목 안 갯마을횟집은 말이 없으면서도 알아서 척척 횟감을 얹어주는 부산 남자가 사장님이다. 오래 되지는 않았어도 칼국수, 김치찌개처럼 누구나 좋아하는 소박한 음식을 내놓는 식당도 많다.

음식점은 아니지만 이 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게가 또 하나 있다. 을지로3가역 부근에 있는 송림수제화로, 1936년 문을 열어 4대째 이어지고 있다. 현존하는 수제화 업체 중 가장 오래됐다. 산악인 고상돈씨가 안나푸르나를 오를 때 신은 등산화를 이곳에서 만들었으며 사격 선수들이 신는 사격화와 산악스키화도 여기서 제작했다. 석고로 발 모양 본을 떠서 맞춤제작을 한다.

을지로 골목 안에 있는 통일집. 외관은 허름하지만 40년 이상 된 전통 있는 음식점이다.
평양식 냉면으로 유명한 을지면옥 입구. 시원한 맛으로 실향민의 애환을 덜어준다.
0맛도 좋고 값도 저렴한 원조녹두집. 전이 특히 유명하다.
을지로 골목 안에 있는 갯마을횟집. 요즘은 도다리와 감성돔이 맛있다.
을지로3가역 부근의 송림수제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제화 업체로 4대째 이어지고 있다.

호프집 10여 곳이 모여 있는 노가리 골목은 저녁이 되면 야외 테이블까지 빈 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손님이 몰린다. 일을 마치고 생맥주로 하루의 피로를 풀려는 사람들이다. 손님이 앉으면 따로 주문이 없어도 생맥주와 노가리가 사람 수대로 나온다. 노가리 골목의 원조인 을지OB베어는 1980년 당시 생맥주 체인인 OB베어 호프집으로 출발했다.

이 집을 연 강효근씨는 황해도 출신인데 그곳에서 김장에 넣어먹던 동태의 맛을 잊지 못하다가 맥줏집을 개업하면서 노가리를 안주로 내놓았다. 초창기에는 500㏄ 한 잔에 380원, 거기에 100원짜리 안주를 더하면 500원도 안 되는 돈으로 생맥주 한 잔을 즐길 수 있었다. 이 가게는 오전에도 문을 여는데 그 시각에 찾아와 맥주를 넘기는 극성 손님이 있다. 골목의 두 번째 가게는 뮌헨호프다. 을지로에 왔다가 OB베어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넘치는 것을 보고 1989년 맥주의 본고장 뮌헨의 이름을 따 가게를 열었다. 한국의 옥토버페스트라는 만선호프는 우리나라에서 맥주가 가장 많이 팔린다는 곳이다. 가게 안은 물론 가게 앞 골목도 맥주잔을 앞에 둔 손님들의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을지로 큰 길 건너편 백병원 쪽으로는 골뱅이 골목이 있다. 골뱅이와 대구포, 파채를 섞어 무친다. 계란말이와 시원한 국물도 함께 내놓는다.

노가리 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생맥줏집인 을지OB베어.
노가리 골목에 있는 맥줏집 만선호프. 저녁 시간이면 손님들로 가득 찬다.
● 을지로를 찾아온 젊은이들

기계 소리 나는 을지로의 주인공은 나이 든 아저씨들이다. 그런 동네에 요즘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관할 행정기관인 서울 중구청이 빈 가게를 젊은이에게 싸게 임대해주자 찾아 들어온 것이다.

을지로 대림상가 옆 골목의 ‘퍼블릭쇼’에서는 지난해 7월 입주한 장준기(30)씨가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처럼 이야기 주인공의 캐릭터와 오브제를 도자기로 만든다. 완성품을 모아 줄을 세워 놓으니 의젓한 병사처럼 보인다.

'퍼블릭쇼'의 선반에 놓인 도기 작품들

‘이현지을지로기록관’은 ‘퍼블릭쇼’ 바로 옆에 있다. 20대 중반의 이현지씨가 을지로의 현재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고 있다. 특히 관심을 갖고 촬영하는 것은 붓으로 쓴 간판 글씨다. 촬영한 것이 모이면 전시회도 열 계획이다. 이현지씨는 “우리 동네에 젊은이들이 왔다며 다들 잘 대해주신다”며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분들도 많다”고 했다. 바로 옆 더 좁은 골목에는 폐자전거로 인테리어 소품을 제작하는 ‘서클활동’이 있다. 이렇게 을지로의 빈 가게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젊은이가 현재 여덟 팀이나 된다. 이들이 을지로 문화를 어떻게 바꿔나갈지 관심 갖고 지켜보는 사람이 많다.

을지로기록관 앞에 선 이현지씨. 을지로의 모습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고 있다.

서울 중구청은 최근 을지로 골목 투어 프로그램인 을지유람의 운영을 시작했다. 골목 바닥에 사람 다리와 화살표가 그려져 있으니 이 표시를 따라 걸으면 즐거운 도심 여행이 될 수 있다. 대도시 서울의 한 복판에 있어 오히려 덜 알려졌지만 실은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없는 개성 강한 동네가 바로 을지로 3ㆍ4가다.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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