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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저울] 긴급조치 국가배상 책임 없다는 대법원 판례에 하급심 반기드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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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의 저울] 긴급조치 국가배상 책임 없다는 대법원 판례에 하급심 반기드는 이유

입력
2016.03.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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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엔 칼, 한 손엔 저울을 든 법의 여신 디케. 과연 지금 현실에서 법은 냉철하게 정의를 구현하고 균형감각을 유지하는지 살펴본다.

“유신 반대로 감옥에 있을 때 큰 아들이 태어났다. 난 처와 결혼식도, 혼인신고도 하기 전에 감옥에 끌려가서 내 아들은 당시에 사생아로 돼 있었다.” 1970년대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유인물이 든 책을 지인에게 건넸다가 긴급조치 1호 등 위반 혐의로 옥살이했던 고(故) 황모씨 유족 측이 한국일보에 최근 제공한 황씨의 비망록 중 일부다. 황씨 유족은 긴급조치 발동은 기본권을 짓밟은 위법한 대통령의 직무행위였다며 국가에 책임을 묻겠다고 소송을 냈지만 지난달 19일 항소심에서도 기각 당했다. 1년 전인 지난해 3월 대법원이 긴급조치 발령은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이처럼 국가배상 기각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 하급심은 최고법원의 논리를 깨는 ‘소신’ 판결을 내놓고 있다. 대법원 판례를 거스르는 하급심 판결이 유지될 수 없는 게 당연한데도 이런 항명이 수차례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통치행위면 불법 저질러도 되나

2015년 3월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20일간 구금된 최모씨에게 200만원의 국가 배상판결을 내린 원심을 깼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에게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는 논리였다.

이는 2010년 말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긴급조치가 위헌임을 인정한 취지와는 딴판이었다. 2010년 대법원은 “법치주의 원칙상 대통령의 통치행위라 하더라도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당시 대법원은 이렇게 선언했다. “통치행위 개념을 인정하더라도, 과도한 사법심사 자제가 기본권을 보장하고 법치주의 이념을 구현해야 할 법원의 책무를 태만히 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지극히 신중해야 한다.”

2015년의 대법원은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의 판결로 전원합의체 판결을 뒤집고 국가배상 책임에 면죄부를 줬다는 논란을 낳았다. 문병효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11월 ‘민주법학’에 “헌법상 절차와 한계를 벗어나 발동한 긴급조치라고 법원이 판단해놓고, 정치적 행위라는 이유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권의 보루로서의 대법원 책무를 포기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하급심의 이유 있는 반기

대법원 판단에 1심 법원이 반기를 든 것은 6개월 뒤인 2015년 9월이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1부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해 처벌 받은 송모씨에게 “국가는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판결문에 밑줄로 강조된 대목이 있었다. ‘헌법에 명백히 위반되는 국가긴급권을 굳이 행사한 경우라면 국가배상법상 위법행위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내용으로, 대법원이 옛 판례를 원용하며 빠뜨린 부분이었다. 2015년 3월 대법원은 국가배상 책임을 부인하며 ‘국회의원의 입법행위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여서 정치적 책임만 물을 수 있다’고 한 옛 판례를 원용했는데, 이 판례는 불법행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예외적 조건으로 ‘명백히 위헌인데도 굳이 국가긴급권을 행사한 경우’를 들고 있었다.

지난달 초 광주지법 민사합의13부도 이 판례를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적용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법리를 원용한 잘못이 있다”고 비판했다. 다수결로 하는 국회의원의 입법활동과 당시 대통령 혼자 판단으로 발령한 위법한 긴급조치가 어떻게 동일하게 비교되냐는 지적이었다. 재판부는 “이제 와서 새삼 긴급조치가 위헌임을 부인하는 것은 대법원 위헌결정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대법원을 작심 비판했다.

고뇌 없는 기각만 줄이어야 하나

이례적 판례 항명에 대해 법무법인 지향의 이상희 변호사는 “사법부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하급심 판사들의 노력”이라고 평했다. 서울 소재 K대 로스쿨 교수는 “대법원이 배상을 제한한다는 결론을 내놓고 쉽게 가려다가 기존 대법원 판결과도 상충되는, 하급심도 수긍하기 힘든 논리를 내놨다”고 꼬집었다. 재경법원 판사는 “막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하기는 국가재정 면에서 곤란하다고 대법원이 판단한 듯하고, 일부 하급심들은 인정할 건 해야 한다고 판단한 듯하다”고 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담당한 210여건의 민사소송 중 일부 피해자들은 대법원에 대한 항의 표시로 1원, 100원, 1만원 등으로 배상액을 낮춰 상소했다.

일부 하급심들은 다음 변론 기일을 7~9월로 미루기도 한다. 논란의 2015년 대법원 판결에 대한 헌법재판소 판단을 지켜보자는 것이라는 게 법조계 인사들의 얘기다. 민변 등은 지난해 8월 “대법원과 헌재가 위헌으로 본 내용을 판결에 적용해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어서 심판대상이 된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헌법재판소는 대법원 판결을 어찌 판단할지 법조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손현성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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