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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인 지난해 3월 대법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은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해석을 내놨습니다. “하급심의 판단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제시한 ‘가이드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1심 판사들이 최고법원의 논리를 깨는 ‘소신’ 판결을 잇따라 내놓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대법원도 불과 6년 전 내린 판단 취지를 스스로 뒤집은 것이었습니다. 과연 어느 쪽이 ‘튀는 판결’을 했을까요.

통치행위면 불법 저질러도 되나

2015년 3월 26일,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1978년 긴급조치 9호 위반을 이유로 20일간 불법 구금된 최모씨에게 200만원의 국가 배상 판결을 내린 원심을 깼습니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부정ㆍ비방하는 주장이나 보도를 금지하고 어기면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것입니다. 박 전 대통령이 1972년 제정한 유신헌법 53조에 바탕해 1975년 5월 선포한 뒤 4년 7개월 가량 지속되며 대학생 등 국민을 탄압하는 데 남용됐습니다.

대법원 논리는 이랬습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서 국민 전체에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에게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 긴급조치 발령은 ‘통치행위’라서 불법이라 볼 수 없다는 겁니다.

과거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임을 이미 인정했는데도, 그 취지와는 딴판인 결론이 나온 것입니다. 2010년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차한성 대법관)는 긴급조치(1호)가 위헌ㆍ무효라는 만장일치 결론을 내렸습니다. 1970년대 당시 국내외 정치ㆍ사회 상황에 비춰볼 때, 대통령이 발동한 긴급조치는 국가의 중대한 비상사태 상황에 한해 발령하도록 한 당시 유신헌법(53조)상의 발동 요건도 못 갖췄고, 내용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해 위헌이라 판단한 겁니다. 당시 대법원은 “법치주의 원칙상 대통령의 통치행위라 하더라도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어 “통치행위 개념을 인정하더라도, 과도한 사법심사의 자제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법치주의 이념을 구현해야 할 법원의 책무를 태만히 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지극히 신중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1974년 8월 긴급조치 1, 4호 해제를 알리는 벽보판을 보는 시민들. 긴급조치9호는 1979년 12월 해제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2015년의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이기는 하나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이 불법은 아니라는, 참 난해한 판단을 내놨습니다. 긴급조치 1호가 위헌이라는 2010년 대법원 판단에 이어 긴급조치 9호가 명백히 위헌이라는 건 2013년 4월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의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2015년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의 판결로 말미암아 전원합의체의 판결을 뒤집고 국가배상 책임에 면죄부를 줬다는 논란을 낳았습니다. 문병효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상 절차와 한계를 벗어나 발동한 긴급조치라고 법원이 판단해놓고, 대통령의 명백한 고의ㆍ과실에 의한 행위임에도 단지 정치적 행위라는 이유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권의 보루로서의 대법원 책무를 포기한 행위”라고 비판했습니다. (‘대법원의 긴급조치 관련 판결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 <민주법학> 2015년 11월 투고 글)

하급심의 이유 있는 반기

이후 하급심들은 2015년 대법원 판단을 그대로 긁어 판결문에 붙이며 줄줄이 국가배상 기각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던 지난해 9월 1심 법원이 대법원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1부(부장 김기영)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해 처벌 받은 송모씨와 가족에게 “국가는 1억원을 배상하라”고 주문합니다. 당시 판결문에 밑줄로 강조된 대목이 있었습니다. ‘헌법에 명백히 위반되는 국가긴급권을 굳이 행사한 경우라면 국가배상법상 위법행위에 해당한다’는 내용입니다. 2015년 대법원은 국회의원들의 입법행위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여서 정치적 책임만 물을 수 있다고 한 옛 판례를 원용해, 국가배상 책임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옛 판례는 정치적 책임 외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예외 조건으로 ‘명백히 위헌인데도 굳이 국가긴급권을 행사한 경우’을 들었음에도, 2015년 대법원은 이를 간과한 것입니다. 대법원이 빼놓은 예외 단서를 명시하면서 1심은 “헌법 수호 의무가 있는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가 헌법에 명백히 위반됨에도 (굳이) 행사한 것은 특수한 경우에 해당하고, 이는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고 밝혔습니다.

나중에 대법원에서 파기되기는 했지만 대전지법 민사2부(항소부)도 이와 동일한 취지의 판결을 했습니다. 민사2부는 “긴급조치 발령을 사법부가 심사하지 않으면, 헌법과 법률에 구속 받지 않고 통치행위를 하는 새로운 사회적 특수계급을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대통령의 불법행위로 피해 입은 국민들의 국가배상청구권을 전면적으로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긴급조치 발령은 국민의 지지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탄생한 유신정권이 당시 체제에 저항하거나 그럴 우려가 있는 국민들을 탄압하려고 행해진 특수한 불법행위로 인권침해의 불법성이 매우 중대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지난달 초 광주지법 민사합의13부(부장 마은혁)도 국회의원 입법활동은 정치적 책임만 있다는 옛 판례를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적용한 2015년 대법원 판결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법리를 원용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수결로 하는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과 당시 대통령 혼자 판단으로 발령한 위법한 긴급조치가 어떻게 동일하게 정치적 책임만 지는 비교대상이 되냐는 겁니다. 재판부는 이어 “이제 와서 새삼 긴급조치 9호의 위헌성을 부인하는 것은 법치주의 최후의 보루로서 했던 대법원의 위헌 결정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아예 작심하고 대법원을 비판했습니다. 당시 유신헌법상으로도 발령 요건도 못 갖춘 긴급조치를 위헌이라 했으면, 발령 행위도 위법하다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으로 읽힙니다.

고뇌 없는 기각만 줄이어야 하나

이런 판례 항명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법무법인 지향의 이상희 변호사는 “헌법이 부여한 사법심사 권한을 사실상 스스로 포기해 버린 대법원과 달리 사법부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하급심 판사들의 노력”이라고 평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소재 K대 로스쿨 교수는 “대법원이 배상을 제한한다는 결론을 내놓고 쉽게 쉽게 가려다가 기존 대법원 판결과도 상충되는, 하급심도 수긍하기 힘든 논리를 들어 이런 꼴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판례 항명은 불과 석 달 만에 다시 깨지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9월 대법원에 반기를 든 서울중앙지법의 판결은 같은 해 12월 서울고법 민사8부(부장 여미숙)에서 단 한 차례 변론만 거친 뒤 대법원 논리를 따라 기각됐습니다. 대법원이 첫 판단 이후 심리 없이 상고를 물리치는 심리불속행 기각을 적어도 10건 이상 잇따라 내리기도 했습니다. 하급심들이 대법원과 다른 판단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일부 하급심들은 2~3개월 만에 기각 처리하지 않고 다음 변론 기일을 7~9월로 미뤄 시간 여유를 두기도 합니다. 문제적 대법원 판결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려보자는 것이라고 법조계 인사들은 이야기합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은 지난해 8월 “대법원과 헌재가 위헌으로 본 내용을 판결에 적용해 기본권을 침해한 경우여서 심판 대상이 된다”며 대법원 판결에 대해 헌법소원을 냈습니다. 아울러 법원 판결에 헌법소원을 금지하는 헌법재판소법 68조 1항에 대해서도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재경법원 판사는 “수백명의 피해자들에 대한 막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하기는 국가 재정 측면에서 곤란하다고 대법원이 판단한 듯하고, 일부 하급심들은 인정할 건 해야 한다고 판단한 듯하다”면서 “대법원이 그것을 ‘반기’로 보고 불편해해선 안 된다. 그리 보는 게 사법부에는 최악”이라고 말했습니다. 민변에 따르면 민변 변호사들이 담당한 210여건의 민사소송 중 상당수 피해자들은 끝까지 국가의 책임을 묻겠다고 합니다. 일부는 대법원에 대한 항의 표시로 1원, 100원, 1만원 등 소액으로 배상액을 낮춰 상소했습니다. 배상청구권을 제한하려고만 하고 과거사 정리 문제를 되돌린 대법원에 대한 항의 표시인 셈이죠.

물론 “간통죄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 났다고 그걸로 처벌받은 사람들에게도 국가가 배상해야 되냐”고 반문하는 판사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법원 밖 법조계 인사들은 “간통죄는 국회의원들의 입법 결과물로 정치적 책임만 질 사안이지만, 명백한 대통령의 단독 불법행위인 긴급조치 발동과 견줄 수는 없다”고 반박합니다. 어차피 지금의 대법원에서 1년 전 판결을 재평가할 리는 없겠지만 최고법원답지 않은 논리였다는 비판이 법원 안팎에서 여전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제, 헌법재판소는 대법원 판결을 어찌 평가할까요.

손현성기자 hshs@hankookilbo.com

유신헌법 53조와 긴급조치 1호, 2호, 9호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내려진 2013년 3월 21일 백기완(오른쪽 네번째) 통일문제연구소장과 긴급조치 피해자 대책위 회원들이 헌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앞서 묵념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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