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지난해 9월 창간한 잡지 악스트. 기존 문학판 알력에 휘둘리지 않는 새로운 잡지를 추구했으나 1, 2월호 듀나 인터뷰 사태로 SF 팬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악스트 홈페이지 캡처

힙합 디스전(戰)에서 언젠가부터 문학판이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래퍼들이 ‘real hiphop(진짜 힙합)’이라는 실체 없는 대상에 누가 더 가까운가를 두고 싸우는 것처럼, 문인들도 ‘진짜 문학’이라는 허구 앞에서 지리한 싸움을 이어왔다. 디스전이 오버와 언더 래퍼 간의 오랜 증오를 동력 삼는다면, 문학판에도 두 진영이 있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이다.

이 싸움이 최근 또 점화됐다. 일명 ‘악스트의 듀나 인터뷰 사태’다. 지난해 기존 문단의 폐쇄성을 깨고 새로운 문학잡지를 추구한다며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창간한 격월간지 악스트는 1ㆍ2월호 인터뷰이로 듀나를 찍었다. 1990년대 하이텔 과학소설 동호회 시절부터 SF소설을 써온 듀나는 영화, 문학, 페미니즘 등 다양한 분야의 글로 주목 받고 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얼굴이나 신분을 공개한 적이 없는 베일에 싸인 작가이자 평론가다. 인터뷰어는 악스트 편집위원인 소설가 배수아, 백가흠, 정용준. 얼굴 없는 작가 듀나의 뜻에 따라 서면으로 진행했다.

인터뷰는 공개되자마자 SNS에서 적잖은 논란을 일으켰다. 인터뷰어의 질문이 무례하다는 문제제기였다. 비판자들은 인터뷰어들이 듀나가 결혼을 했는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등 신상만 궁금해하고 작품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며 순문학 진영이 얼마나 SF계를 무시하는지에 대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1인 SF웹진 ‘알트 SF’가 악스트 비판 기사를 내며 참전했다. 인터뷰를 단락 단위로 인용해 질문의 저의를 조목조목 비난하는 글에, 은행나무 출판사가 저작권 침해라며 법적 제재를 암시하는 메일을 보냈고 알트 SF가 휴간을 선언하면서 ‘상황’은 ‘사태’로 확대됐다.

‘글에 글로 답하지 않고 힘없는 1인 웹진을 휴간시켜버린’ 은행나무 출판사를 향해 순문학 쪽 작가들조차 “잘못된 대응”이라며 질타하고 나섰다. 여론이 악화되자 과거 SF웹진을 운영했던 장강명 작가는 20일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알트 SF 기사의 글이 인신공격 수준이었다며 “몇몇 사람들은 악스트의 인터뷰가 문단의 수준과 태도를 드러냈다고 주장한다.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알트 SF 기사는 한국 SF 독자들의 수준과 태도를 드러낸 셈”이라고 옹호했다.

악스트는 3ㆍ4월호에 백다흠 편집장 이름으로 장르문학에 대한 접근이 신중하지 못했던 점과 출판사 저작권팀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해명하는 글을 실을 예정이다.

악스트는 창비,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등 주류 문학출판사들이 조성한 ‘문단 생태계’를 비판하며 나온 잡지다. 간행 취지에 따라 이 잡지에는 천명관, 박민규, 공지영 등 소위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문인들의 인터뷰가 연달아 게재됐다. 듀나 인터뷰 역시 같은 맥락이다. ‘다른 곳에서 하지 않는’ 것들을 시도하다가 이 사단이 난 셈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문학권력은 인간이 정착한 곳이라면 어디나 생겨난다? 장르문학은 건드리면 안 되는 위험한 짐승이다?

한때 순문학과 장르문학이 힙합의 오버와 언더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400개에 이르는 문학상, 유명 출판사를 통한 책 출간, 문예지와 언론 매체의 관심, 모두가 문단 작가 즉 순문학 작가들을 위한 것이었고 한국의 장르문학은 돈도 명예도 없이 명맥 유지에 허덕여왔다(천명관 소설가가 ‘한국형 장르문학’이라 일컬은 김진명 소설 등이 돈을 번 극히 예외적인 사례가 있긴 하다. 물론 명예는 벌지 못했다).

그러나 수년간 이어진 문학 시장 침체로 오버와 언더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독서 행위 자체가 소수 취향이 되면서, 문학판에 남은 것은 오랜 불균형이 만들어낸 원한의 프레임뿐이다. 장르문학 작가들은 외부 시선에 지극히 방어적이고, 순문학 작가들은 문단 활동 여부와 무관하게 ‘썩어빠진 문단’이란 연좌제에 묶여 고통 받고 있다.

지난해 신경숙 사태 이후 문학계에선 ‘짜인 판’을 벗어나려는 의미심장한 움직임들이 제법 감지된다. 장르문학과 순문학, 진짜 문학과 가짜 문학의 싸움을 이해 못하는 이들은 이미 태어났고 지금도 태어나는 중이다. 이들에게 줄 것이 기존 싸움판에서 빚어진 무거운 굴레 밖에 없을까.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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