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자기형 사치하는 2030

쥐꼬리 월급의 절반 이상을 꼬박 저축해도 내 집 마련의 길이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연애, 결혼, 출산은 물론 그 이상을 포기한 이른바 N포세대가 된 지 오래다. 부모세대는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의 문이 활짝 열렸고 몇 년간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면 서울에 번듯한 아파트를 장만했다는데 불과 20~30년 전에 그런 세상이 있었는가 싶다.

이런 상황에 처한 2030세대들이 일상을 사는 해법은? 바로 ‘현재를 즐겨라’다. 악착 같이 살아봤자 수도권에서 내 집 마련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고 적은 월급에 돈을 모은다 해도 푼돈은 어차피 푼돈이니 차라리 평소 갖고 싶던 명품 가방을 사거나 고급 취미를 즐기면서 오늘 하루라도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이른바 ‘자포자기형 사치’다.

“집은 어차피 못 사요”…저축 대신 고급취미 즐기고, 자동차 사고

은행원 김나영(25)씨는 2년 전 입사하면서 5년 차까지는 저축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당분간 결혼 계획도 없는데다 저축해봤자 큰 돈을 모아 집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신 김씨는 일상에 투자하기로 했다. 뮤지컬 관람이 취미인 김씨는 한 달에 50만원 이상을 뮤지컬을 보는 데 쓴다. 가끔은 이 고급 취미를 즐기기 위해 뮤지컬의 본고장인 영국 런던에 가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여름에는 런던에서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위키드 등 10개가 넘는 뮤지컬을 보고 왔다. 김씨는 “한 달에 50만원씩, 뮤지컬 관람에 쓰는 돈을 1년간 꼬박 모아도 600만원인데 서울의 웬만한 원룸 보증금도 안 되는 액수”라며 “차라리 귀족들 취미라 불리는 뮤지컬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 순간 만큼은 부자가 된 기분을 만끽하는 쪽이 더 좋다”고 답했다.

일본계 회사에 근무하는 손모(30)씨는 입사 1년도 채 되지 않아 고가의 승용차를 뽑았다. 집안 사정이 넉넉한 편도 아니고, 결혼 비용도 스스로 감당할 생각이지만 적금 통장은 따로 없다. 월급을 마음껏 쓰고, 남은 돈으로 주식에 투자하는 정도다. 손씨는 “3년 안에 돈을 바짝 모아 집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허리띠를 졸라매고 월급의 80%까지 저축할 텐데 요즘 서울 집값을 보면 도저히 계산이 안 나와 오늘 하루라도 즐겁게 살려고 한다”고 했다.

모형 1개당 기본 수십만원이 넘는 프라모델(플라스틱으로 된 조립식 모형 장난감)이나 애니메이션 피규어 수집이 취미인 4년 차 직장인 임광철(32)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들은 취미에 너무 큰돈을 쓴다고 하지만 임씨는 이를 포기하고 저축을 할 때 얻는 효용을 잘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임씨는 “서울 시내 평균 아파트 가격이 5억원이라고 하는데 한 달에 250만원씩 모아도 17년 정도가 걸린다”며 “50살이 될 때까지 집만 바라보며 악착 같이 살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좌절하는 청년. 게티이미지뱅크
전문가들 “N포세대의 슬픈 단면…섣불리 나쁘다고 비판 못해”

전문가들은 이러한 2030세대의 자포자기형 사치를 “N포세대의 슬픈 단면”이라고 진단하면서도 “합리적인 소비의 측면이 있기 때문에 섣불리 나쁘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고 분석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건 현재이고 그런 면에서 현재에 충실한 자포자기형 사치는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다”며 “사실상 선택지가 없는 2030세대에게 기성세대가 대안 없이‘너희들 그러면 안돼’라고 말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꼰대(늙은이)의 소리’로 비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수백 건의 자기소개서와 필기시험, 면접을 거쳐 어렵게 취업이란 관문을 통과했지만 학자금 대출 갚기는 벅차고 내 집 마련, 결혼이라는 2기 과제를 완수할 엄두가 안 나는 게 2030세대가 처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암울한 상황은 각종 통계로도 입증된다. 한국감정원이 발표한 2015년 하반기 전망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대비 주택가격 비율을 나타내는 PIR(Price to Income Ratio)은 7.3(서울)으로 7년 넘게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서울의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다. 월급의 절반을 저축한다고 하면 14년이 걸리는 셈인데, 청년들이 실제 체감하는 기간은 더 길다. 청년들이 사회초년생이 되기 전 감당해야 하는 등록금도 치솟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4개 회원국과 중국 인도 등 12개 비회원국의 대학 등록금을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사립대 평균 등록금은 8,554달러(약 733만원)로 미국(2만1,189달러)에 이어 두 번째(자료 공개 12개국 중)로 많았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런 자포자기형 사치에 대해 “미래를 포기하고 현실에서 만족감을 구하려는 세대의 단면”으로 표현하면서도 “2030세대들이 건강하게 일상을 사는 방법의 하나로 나쁘게만 보이진 않는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오늘은 참고 내일은 즐겨라’가 전혀 통하지 않는 사회인만큼 무기력에 빠져 아무 것도 안 하기보다 ‘오늘이라도 즐기자’는 쪽이 건전하다는 것이다.

물론 자포자기형 소비가 유일한 합리적 대응방식이 아니라는 지적은 있다. 전 교수는 “본인의 기대수준을 현격하게 낮추거나 다른 가치를 추종하는 방법도 있기 때문에 현재 상황의 돌파구를 왜 소비주의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지 2030세대들에게 물을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승임기자 choni@hankookilbo.com

송은미기자 mysong@hankookilbo.com

전혼잎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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