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30년, 후쿠시마 5년 현장리포트]

1부: 체르노빌은 현재진행형이다 <1> 출입금지구역을 가다

인구 줄었지만 원전 노동자 등 수천명 체류
거주금지구역 주민 168명 “집 두고 어디로”
늑대 등 활보… 자연의 끈질긴 복원력
출구 방사능 검사기 고장… 공포 무뎌진 듯
체르노빌 출입제한구역 취재경로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잿빛 하늘 탓에 시간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체르노빌, 30년 전 최악의 원전폭발사고가 났던 그 악몽의 장소로 가는 길은 그래서 더 스산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텅 빈 도로를 1시간 30분쯤 내달렸다. 고르지 못한 도로 탓에 멀미가 날 즈음 차가 겨우 멈췄다. 안내인은 “출입금지구역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상점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금 사야 한다”며 차에서 내렸다. 투박한 콘크리트 벽의 작은 상점이었지만 생필품과 술, 전자기기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진열돼 있었다.

안내인은 이곳에서 설탕과 밀가루, 딱딱한 빵을 샀다. 커다란 포대에서 퍼낸 설탕과 밀가루는 옛날식으로 무게를 달아 비닐봉투에 담겼다. 그는 “존(Zone)에 살고 있는 자발적 귀향자를 위한 작은 선물”이라며 “안에는 상점은커녕 전화도 잘 안되기 때문에 우리처럼 밖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필품을 사다 준다”고 말했다.

존은 체르노빌의 출입금지구역을 일컫는 말. 원전에서 반경 30㎞와 10㎞, 두 범주로 관리되고 있다. 10km 내 지역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방사선 수치가 높아 주의가 요구되며, 30km 내 도로 등 공공시설은 수년에 걸친 제염작업으로 방사선 수치는 키예프와 비교해도 큰 차가 없다.

존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다만 출입허가를 받은 관계자와 반드시 동행해야 하고, 사전에 관할관청인 비상사태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취재진은 비영리단체 ‘프리피야트닷컴’의 기술 및 국제분야 담당 알렉산더 리박씨의 안내를 받았다. 프리피야트는 체르노빌 인근에 있던 도시 이름으로, 이 단체는 체르노빌 사고와 도시에 관한 자료를 수집, 온라인을 통해 무료 제공하고 있다. 본래 IT업계에 종사하는 리박씨는 체르노빌에 대한 개인적 관심으로 7년 전 단체에 합류, 여가 시간에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존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체크포인트에 도착했다. 차 안에서 잰 방사선 수치는 0.12μsv/h. 평균 0.11 μsv/h 인 서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1μsv/h는 시간당 1마이크로시버트 만큼의 방사능이 나온다는 의미. 0.05~0.3μsv/h는 일상생활에서도 검출될 수 있는 양이다). 사전등록 정보와 여권 대조절차를 거쳐‘존 안에서의 지시사항’이 적힌 종이를 받았다. ‘몸과 머리, 손, 발 등 신체를 최대한 가리는 옷과 신발을 신을 것’, ‘사전에 허가 받은 루트로만 이동할 것’ 등 총 13가지 금지사항이 명시돼 있다. 실외에선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담배를 피워서도 안되며, 존 안에 있는 어떤 물건도 반출해선 안 된다. 아무 곳에 앉거나 만지는 것도 금지된다.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게 더 많은 존 투어는 이런 내용을 숙지했으며 지키겠다는 사인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다.

흔적도 없이 땅에 묻힌 마을

체크포인트를 지나면 넓게 쭉 뻗은 도로 옆으로 마른 풀이 무성하다. 마침 폐쇄된 버스정류장 하나가 덩그러니 보인다. 뒤편은 과거에 마을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그냥 버려진 들판이 되었다. 안내인은 “웬만한 동네들은 폐허 상태로 남아있지만 방사능 오염이 심각했던 코파치와 치스토할리프카, 두 곳은 마을 전체를 완전히 땅속에 묻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코파치는 예전 유치원으로 이용됐던 콘크리트 건물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아 방문객들을 맞고 있는데, 주변에는 여전히 방사능 수치가 높은 ‘핫 스팟’이 곳곳에 존재한다.

도로 곳곳에 ‘야생동물 주의 표지판’이 눈에 띈다. 안내인은 “해가 지면 투어가 통제되는 것도 이 야생동물 때문이다. 밤 늦게 늑대 떼를 만난다고 한번 상상해보라”고 말했다. 30년간 사람의 손을 타지 않다 보니 죽음의 땅에도 자연의 복원력은 작동하고 있었다.

낮과 밤이 바뀌는 도시 체르노빌

체크포인트에서 20여분을 달리면 도시 체르노빌에 도착한다. 체르노빌 발전소는 도시 서북쪽으로 약 13㎞ 떨어진 곳에 있었다. 체르노빌은 사고 전 인구 1만 4,000명으로 이 지역에서 가장 붐비는 도시였다. 규모는 현저히 줄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원전에서 30km 반경 내에 위치해 강제피난구역에 속하기는 했어도,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가 적었던 데다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지금도 관련 노동자들이 머물며 통근하는 지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퇴근을 하는 약 5,000명의 노동자들은 과거 주민들이 살던 건물을 기숙사로 재사용하거나 호텔 등에 머물고 있다. 도시에는 원전 안에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회사 사무실도 있다. 낮에는 텅 빈 도시이지만 해가 지면 통근 버스에서 우르르 내리는 노동자들과 불 켜진 건물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취재진은 체르노빌 시내2층짜리 호텔에 짐을 풀었다. 방값은 트윈룸 기준 하루에 600흐리브냐(한화 약 3만원). 안내인은 “존 안에서 판매되는 모든 음식은 밖에서 철저한 검사를 거친 뒤 조리되기 때문에 안전성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운송과 검사 과정 때문에 물가는 전체적으로 비싼 편”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방문객들은 이 호텔에 대해 “소비에트 스타일. 존 안에서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는 몇 없는 오아시스”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오후 10시 이후에는 호텔 밖을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난방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였다. 30년 전의 비극이 여전히 살아있는 체르노빌의 첫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존을 지켜온 이들

알렉세이 모스카렌코씨는 원전 사고 전 인근도시 프리피야트의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지난해 초 체크포인트 관리차장으로 퇴직했다. 사고가 나기 전날 밤인 1986년 4월 25일에도 그는 원전 주변을 순찰했다. “사고 당일 ‘펑’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너무 작아서 2km만 떨어져 있어도 듣지 못할 정도였어요. 소방차 사이렌이 울리는 것도 제게는 일상이었기 때문에 괘념치 않았고요. 그런데 단순 화재와는 다른 색깔의 불길인 거에요. 3,4호기 위 굴뚝에서 검은 링이 형성되는 것을 보았어요. 전선이 타는 것 같은 냄새와 함께 하늘에서 눈처럼 무언가가 떨어졌어요. 그때 저는 불과 400m밖에 있었습니다.”

그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소방수들은 불을 끄러 갔고 경찰 동료들은 주변을 체크했지요. 그날 밤, 여경들이 신체적 고통을 호소했어요. 다음날 건강체크를 받은 동료들은 유일한 원자력병원이 있는 모스크바로 보내졌고 얼마 뒤 죽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을 안전한 친척집으로 피신시키고, 프리피야트에서 사람들이 모두 대피할 때까지 현장을 지켰다. 며칠 머무르는 동안 그는 엄청난 피폭을 당했다. 첫날 받았던 가스마스크는 다음날 모두 회수되었고, 개인선량계도 높은 수치 때문에 잠깐 제공되었다가 말았다. 피폭제한량을 다 채운 경찰들은 수도 없이 교체됐다.

그런데도 모스카렌코씨는 체르노빌 사고에 대해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말한다. “자동차 사고와 같은 거예요. 방사능에 대한 피해가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을 영구 대피시킨 것은 정치적 속셈으로밖에 안보입니다. 원전을 대책 없이 닫으면 수많은 원전 기술자들은 어떻게 하나요. 안전하게 사용한다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좋지 않다”고 짧게 답한 뒤 빙그레 웃기만 했다. 현장에서 자신이 얼마나 용감했는지,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때 그 상황을 얼마나 하찮게 생각했는지를 묘사할 때 말이 끊이지 않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피해자’가 아니라 ‘애국자’로 여기고 있는 듯 했다.

체르노빌 제한구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한때 원전노동자들의 기숙사를 운영했던 발렌티나 할머니가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원전에서 10여㎞ 떨어진 마을에 혼자 살고 있는 발렌티나 할머니도 30년째 존을 지켜온 사람 중 하나다. 제염작업 등에 투입된 원전 노동자들을 위한 도미토리 5곳을 15년 동안 운영했다. 그는 정부에서 다른 지역에 아파트를 제공했지만 도시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생각해 대피 5일만에 이곳으로 돌아와 도미토리를 열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잘 곳이 부족해서 바닥에 자는 노동자들이 많았어요. 들어오면 씻고 자기 바빴기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나눌 여력도 없었죠.” 하지만 원전노동자들이 줄면서 지금은 도미토리를 정리하고 인근 교회 일을 돕고 있다.

168명의 사람들

체르노빌 거주금지구역에는 현재 발렌티나 할머니와 같은 자발적 귀환자 168명(2015년 11월 기준)이 살고 있다. 땅과 연결된 사람들, 대부분 사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이들이다. 1980년대만 해도 1,200명에 이르렀지만 노령화로 인해 그 수가 현저히 줄었다. 돌아온 이들은 본래 자기집에 돌아간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회적 인프라가 제로에 가까운 상황에서 서로를 돌보기 위해 모여 산다.

제한구역 내에 살고 있는 한나 자보로냐 할머니가 취재진들에게 주기 위해 아궁이에서 익힌 사과를 자르고 있다. 체르노빌 출입금지구역 안에는 할머니처럼 지금도 168명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원전 30㎞내 구역에 있는 쿠포바치에 거주하는 한나 자보로냐 할머니도 그 중 하나다. 몸이 불편한 여동생과 함께 살아가는 할머니는 사고 뒤 3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기서의 내 삶은 최고야. 살 집과 보상금이 있었지만 내 집과 밭이 여기 있는데 어디를 가.” 방사능에 대한 우려 섞인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할머니는 먼저 단호하게 말했다. “달리 아픈 곳은 없고 무릎이 안 좋아서 가끔씩 병원에 가지. 이렇게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식재료와 먹을 것을 사다 주고 나는 여기서 양배추 농사를 지어. 호리브카(우크라이나식 보드카)를 직접 담가서 이웃들과 나눠먹기도 하고.”

할머니의 집은 사고 당시로 시계바늘을 돌려놓은 듯 했다. 방에는 흑백 텔레비전이 켜져 있고, 거실에 놓인 아궁이와 흡사한 시설로 요리와 바닥 난방을 하고 있었다. 식탁 위엔 유대교식 성화가 걸려있었다. 예부터 체르노빌은 유대인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다. 강대국에 빼앗기고 뺏기를 반복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고, 1930년대 초에는 소련의 농업 집단화를 반대하다 식량을 몰수당해 대기근을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의 점령을 받아 유대인이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할머니는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온몸으로 겪어낸 생존자였다. 체르노빌 사고도 이 지역에 닥친 또 하나의 재앙 중 하나였을 터다.

할머니는 애써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기를 꺼렸다. “행복하다, 완벽하다”라면서 처음 보는 이들의 손을 잡고 껴안고 볼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배웅 나온 할머니는 “(존에서 무언가를 들고 나가면 안 된다는) 규정만 없더라도 이 음식들을 다 싸주고 싶은데, 아무 문제 없는 음식인데… 다음에 오면 우리 집에 꼭 들려라”며 한참 손을 흔들었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는 2011년 보고서에서 “체르노빌 거주제한지역에서 채집한 감자와 뿌리채소, 베리류 등에서는 세슘137과 같은 방사성 물질들이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며 2009년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가 식품에 대한 방사능 오염 모니터링을 중지한 것을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들 노인들에겐 어쩌면 방사능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들은 방사능보다 외로움이 더 고통스러워 보였다.

1박 2일의 체르노빌 방문은 그렇게 끝났다. 피폭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시작했지만 위험에 대한 인식은 무뎌지고 있었다. 체크포인트 출구에 설치돼 있는 방사능 검사 기기까지 고장 나 두 번의 검사 중 한 번을 생략했다. 지금도 하루 평균 2,000명의 노동자와 방문객이 이 곳을 오간다. 고장 난 검사기기가 그 무뎌짐을 말해주고 있었다.

체르노빌=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관련 기사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