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집회 현장.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1898년 12월 서울 도심은 오늘보다 추웠고 오늘보다 뜨거웠다. 수천의 대중들(당시 서울 인구가 17만 정도였다)이 덕수궁 대한문 앞과 종로 등에서 의회 출범과 개혁 정부 구성을 주장하는 만민공동회를 잇따라 열었다.

시작은 그 해 3월이었다. 내정 간섭을 노골화하는 러시아 세력을 배척하라며 독립협회가 주도해 1만 명이 종로에 모였다. 대중들이 거의 자발적으로 참석해 자주 독립을 주장한 사실상 첫 대규모 정치집회였다. 그리고 그 집회는 성공했다. 재정권과 군사권을 쥐려는 러시아의 음모를 좌절시키는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회 설립 및 친러 수구파 퇴진과 개혁 정부 수립 요구마저 받아들여졌다.

백정 박성춘은 10월 29일 만민공동회 개막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총군 애국의 뜻을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나라에 이롭고 백성이 편한 길은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나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의 장대로 부딪친들 역부족일 수 있으나 많은 장대를 합한 그 힘은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세 이어지게 합시다.” “총군” “애국” “황제의 성덕에 보답” 등 아직 온전한 의미의 시민정신이 움텄다고 할 수 없는 대목이 보이지만 광장과 거리에 모인 수많은 민초가 따낸 결실이었다.

그리고 11월 5일 중추원 신관제(新官制)에 따라 의회가 개설될 참이었다. 하지만 권력에서 쫓겨날 판이던 친러수구파는 잠자코 있지 않았다. 의회 출범 전날 이들은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공화제로 국가 체제가 바뀔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화들짝 놀란 고종은 이 모든 과정에 제동을 걸었다. 독립협회 해산령도 내렸다.

하지만 만민공동회는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쉼 없이 철야 시위와 대중집회를 열어 고종을 압박했다. 그 과정에서 황국협회가 동원한 보부상들의 몽둥이질을 당하기도 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개혁 세력으로 정부를 구성하도록 요구하고 기능이 제한되어 있지만 독립협회 등 관련자들이 참여한 중추원으로 의회 흉내라도 내서 정치 개혁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꿈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장장 한 달 보름 가까이 서울 도심 시위를 이어간 민초들은 “군대를 동원하라”는 수구파의 속삭임에 솔깃한 고종의 지시로 12월 23일 총검에 밀려 쫓겨나고 말았다.

역사학자들은 만민공동회를 이후 3ㆍ1운동을 비롯한 우리 근현대사 속 비폭력 대중 정치 저항의 출발로 본다. 남대문-시청-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서울 도심의 역사적인 시위와 집회가 그 이후로 여럿 머리에 떠오른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광장은 원래 정치적이다. 분노와 절망이 표출되는 유일한 장소고, 정권과 시민이 벌거벗은 채 맞부딪치는 공론장이다. 시민혁명의 선두주자인 프랑스 레퓌블리크광장에도 정권과 시위대가 맞붙었다. 시민 의지를 표상하는 수만 켤레의 신발 속에는 불순세력의 신발도 섞여 있다. 우리의 광화문광장도 다를 리 없다. 지난 11월 시위에서 맹활약한 복면대원들은 불순, 불만 세력일 개연성이 높지만 그와 구별해 시민들의 분노 심리를 읽어내는 능력, 거기에 응답하는 진심이야말로 국가 법치를 시민 법치로 승격시키는 지혜다. 그러기에 ‘좋은 정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응답력(responsiveness)이라 하지 않는가. ‘응답하라 1988’에 40, 50대가 열광하는 배경에는 호위무사로 나선 장관, 검찰총장의 일방적 발언이 도사리고 있다. 닭장차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젊은 날의 무모함 속으로 망명해서 법치의 시민적 기원을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광화문광장은 주권 시민의 작은 외침들이 켜켜이 묻힌 거대한 역사적 공동묘지다. 1893년 겨울, 전봉준 이하 동학교도들이 지금의 교보빌딩 근처에 목을 조아렸다. 이른바 창교자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교조 신원운동이었다. 척왜양을 주장한 것이 왜 사교(邪敎)인가를 따져물었다. 고종의 비답은 준엄했다. “감히 사악한 설로서 방자하게 대궐 문 앞에서 절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꺼리는 것도 없는 행태가 극에 달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일어난 보은 집회에는 “너희들이 돌을 쌓아 진(陣)을 만들고 장대를 세워 기(旗)를 만들고 칭하되 ‘창의(倡義)’라 하면서 통문을 돌리고 인심을 선동하니…. 창의가 아니라 창란(倡亂)이다”라고 꾸짖었다. 창의와 창란을 헷갈린 국가는 스스로 붕괴의 길을 가야 했다. 광화문 집회를 ‘창란’의 프리즘으로만 보고 싶은 국가는 혹시 그 속에 위태롭게 매달린 시민적 공의(公義)를 놓친다. 눈보라의 일격을 맞고 떨어진 플라타너스 잎사귀처럼 말이다.…

평화시위가 끝난 광화문광장은 일상을 회복했다. 그런데 광장에 피어나는 저 비극적 공감은 점점 드세질 겨울 강풍에도 불구하고 법치의 주인을 묻는 시민들을 불러모을 것이다. 시민정치의 난장이 서는 곳, 광장에 겨울이 온 듯하다.”(중앙일보 12월 8일자 송호근 칼럼 ‘광장의 겨울’▶전문 보기)

“미국처럼 경찰차에 불을 지르거나 영국처럼 탱크를 끌고 나오는 류의 폭력을 넘어서, ‘폭력’이라는 개념을 좀 더 확장하여 사용할 때, ‘모든 시위는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 스무 살 때 처음 입성한 서울은 ‘달콤한 나의 도시’가 되기에는 너무 살벌한 곳이었다.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커다랗고 배고픈 도시 곳곳에서 불쑥불쑥 농성장과 시위대가 출현했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재능교육 농성장의 텐트를 처음 보았을 때이다. 나는 그제야 어릴 때부터 무수한 숨바꼭질을 해왔던 가정방문 학습지 교사의 가혹한 노동 조건과 실태를 인지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가시화는 그런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음으로써 은폐되었던 것들을 불러내는 작업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전까지의 안락한 세계에 타격을 가하고, 말할 수 없던 자들이 말하고, 기존의 방식을 일그러뜨리기 때문이다.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는 법을 ‘법을 정립시키는 폭력’과 ‘법을 유지하는 폭력’ 또는 ‘헌법 수여 폭력’과 ‘헌법’으로 구분했다. 벤야민은 이를 바탕으로 ‘법을 폐기하는 폭력’ 또는 ‘신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추가한다. 법은 사실상 그것을 유지하는 경찰과 군대의 폭력과 늘 혼합되어 뒤엉켜 있는데, 벤야민은 이러한 법의 자기 정당화 기제를 신화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법은 ‘신화적 폭력’이다. 시위대를 도로로 내몰고, 4분 동안 도로교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하는 것이 이러한 신화적 폭력에 해당한다. 지젝은 기존의 권력 관계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신적 폭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것은 체계적 폭력에 대응하는 대중들의 폭력적인 자기 방어고, 기존의 법과 윤리를 중지시키는 해방 기능을 수행한다. 시위나 농성 같은 행위가 여기에 해당한다.”(한국일보 11월 26일자 2030 세상읽기 ‘복면시위왕, 그런 거 없다’▶전문 보기)

“차벽이 없으니 평화가 왔다. 다음 날 아침 읽은 첫 기사의 제목이었다. 대부분 뉴스가 평화로운 집회였다는 내용으로 보도를 마쳤다. 왜, 수만 명이 추운 날씨를 무릅쓰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 앉았는지 까닭은 묻는 뉴스는 좀체 찾아보기 어려웠다. 모양새가 ‘폭력’이든 ‘평화’이든, 그 까닭의 물음과 성찰이 없다면 그날 시위는 금세 잊히지 않을까.

“데모로 사회는 바뀐다, 왜냐하면 데모를 함으로써 ‘데모를 하는 사회’로 바뀌기 때문이다.” 집회ㆍ시위로 무엇이 가능한지 물음에 가라타니 고진의 대답이었다. 그 맥락에서 집회ㆍ시위는 사회가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다는 징표라 생각한다. 고민해봤자 달라질 게 없으니 고민하지 말잔 사람과, 고민을 하는 사람은 서로 많이 다르다.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격차라 생각한다. 수만 명이 모였다. 그 까닭은 아직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이다.”(칼라밍 12월 10일 서종민 칼럼 ‘더 많은 사람이 모일 것이다’▶전문 보기)

김범수기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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