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왼쪽)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조지 H.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모두 1924년 생이다. 김 전 대통령의 호적상 출생연도는 1926년이지만, 등록 지연에 따른 것으로 실제는 1924년 1월6일이라는 게 정설이다. 김 전 대통령은 해운업, 부시 전 대통령은 석유사업으로 젊은 시절 사업에 성공한 뒤 정치를 시작한 것도 비슷하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호남 민심의 도움으로 일어섰던 것처럼 부시 전 대통령에게는 텍사스주가 있다. 부시 전 대통령은 1966년 텍사스 제7구역에서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치를 시작했고, 장남 조지 W. 부시도 텍사스 주지사 경력을 바탕으로 대통령이 됐다.

지난 달 25일 텍사스주에 사는 지인을 만날 기회를 이용, 부시 전 대통령이 1940년대 유전사업에 뛰어들었을 때 살던 텍사스 미들랜드 집을 찾았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60여년 전 사들인 집인데, 입구에는 ‘조지 W. 부시의 어릴 때 집’(The George W. Bush Childhood Home)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입장료(성인 5달러)를 낸 뒤 자원봉사자 리사 번뢰더씨의 안내로 부시 가문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부엌, 침실, 목욕실, 아이들 공부방이 옛날 쓰던 가구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38도에 육박하는 더운 날인데도 북적일 정도는 아니지만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미 중서부 네브래스카 주에서 온 백인 부부를 만난 김에 이 집에서 나고 자란 또 다른 정치인 젭 부시의 2016년 대선 출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반응이 뜻밖이었다. ‘세 번째 부시 대통령을 기대한다’ ‘젭이 여러 후보 가운데 제일 훌륭하다’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사람 좋게 생긴 부부는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렸다.

나중에 오스틴, 댈러스 등 텍사스 다른 지역에서 공화당 지지자들과 많은 얘기를 나눠본 뒤에야 부부의 속내가 짐작이 갔다. “부시 대통령 생가에서, 젭 부시 대신 트럼프를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는 게 말꼬리를 흐린 이유인 듯 했다.

실제로 부시 가문의 안마당까지 흔들릴 정도로 공화당 풀뿌리 계층의 트럼프 열기는 엄청나다. 그들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워싱턴 정치꾼과는 완전히 다르다. 말과 행동이 거칠어도 그 누구도, 그 어느 이익집단에도 매수되지 않은 사람이다.” “트럼프는 우리가 하고 싶었으나, 감히 할 수 없었던 말을 속 시원히 한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이다.” “오바마 이후 미국은 계속 무시당했다. 우리는 제대로 협상도 못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푸틴(러시아 대통령)이나 이란이 쩔쩔 맬 것이다.” “대선 후보 가운데 제 힘으로 돈 한 푼이라도 벌어 본 사람은 트럼프뿐이다. 젭 부시, 힐러리 클린턴 모두 정치인일 뿐이다.”

그런데 이들의 말에서 단어 몇 개를 바꾸면 한국 시민들의 그것과 똑같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의 정신을 잇는다는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자일수록 ‘여의도 정치꾼과는 다르며, 누구에게도 매수되지 않은 채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그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릴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전 새정치민주연합의 지리멸렬 상황을 분석한 한국일보 온라인 기사에는 실제로 이런 댓글이 실렸다. “아직도 모르나? 구닥다리 70, 80년대 이념에 고착화 되어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했나, 고민을 했나, 머리는 굳어있고 돈과 출세에만 눈이 뜬 거다. 눈은 높고, 게으른데 살려니 죽어라 저들끼리 뭉쳐서 시끄러운 거다.”

트럼프 식 돌풍이 태평양 넘어 곧 한국을 강타할 것 같다.

조철환ㆍ워싱턴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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