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의 취흥을 논할 때 중남미는 빼놓을 수 없는 대륙.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취기가 오르는 곳이다. 작은 사진은 여행가 김남희.

음식이 본래 장소를 환기하는 촉매이긴 하지만, 술은 언제나 흥분의 감정으로 그때 그곳의 일을 상기시킨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예로 들어보자. 람블라스 거리의 노천카페에 앉아 상그리아를 마시며 취했던 일은 구엘공원과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느낀 가우디 건축의 경이를 가뿐하게 포섭한다. ‘이곳의 모든 것이 다 좋아’를 외치게 만드는 상그리아의 힘. 상그리아 때문에 가우디를 더 좋아할 수는 있어도, 가우디 때문에 상그리아를 좋아할 수는 없다. 여행지에서의 취흥이란 그토록 강력하다.

극성수기의 휴가철. 텅 빈 도심에서 뻘뻘 땀을 흘리고 있노라면, 이미 돌아왔거나 아직 떠나지 못한 자신이 이내 처량해진다. 하지만 우리에겐 술과 상상력이 있다. 지도를 펼쳐놓고 한잔 술로 더위를 떨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계를 여행할 수 있을 터. 여행가 김남희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마도 그의 추억의 목록일 술 이름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술은 우리를 강타하는 추억이다. 여행은 끝났지만, 추억은 갱신된다.

● 쿠바의 ‘국민칵테일’ 다이키리

쿠바의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모히토를 먹으려고 메뉴판을 정독하고 있는 당신. 또 이 글자와 마주치고 만다. ‘Daiquiri’(다이키리). 하나의 카테고리를 이뤄 다양한 종류의 베리에이션을 열거하고 있는 이 낯선 칵테일 중에는 ‘파파 헤밍웨이’ 또는 ‘파파 도블레’도 있다. 헤밍웨이가 좋아했던 건 모히토 아니었던가.

다이키리는 칵테일의 성서로 불리는 데이비드 A. 엠버리의 1948년 책 ‘칵테일의 예술(The Fine Art of Mixing Drinks)’이 6개의 기본 칵테일 중 하나로 꼽은 칵테일의 고전이다. 화이트 럼을 베이스로 해 라임과 설탕을 가루얼음과 섞어 만드는 다이키리는 쿠바 산티아고 부근의 광산 이름을 딴 칵테일. 1900년도를 전후해 미국인 광산 소유주가 개발한 것으로 알려진 이 칵테일은 무더위에 땀 흘리던 광부들이 시원하게 들이키며 노동의 고통을 잊던 상큼하고도 달착지근한 얼음술이었다.

쿠바의 다양한 아이템들을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일등 공신 헤밍웨이는 다이키리의 전파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헤밍웨이가 단골이었던 아바나의 선술집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의 벽에는 모히토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헤밍웨이의 친필 서명이 붙어 있지만, 필적 전문가들은 위조의 가능성을 높게 본다. 설탕 없는 더블 다이키리와 압생트를 좋아했던 당뇨병 환자 헤밍웨이가 달콤한 모히토를 자주 마셨을 리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추론이다. 모히토와 헤밍웨이의 연관성은 술집의 마케팅으로 인한 그릇된 정보 유포라는 것.

헤밍웨이에 더해 존 F. 케네디 대통령까지 다이키리를 즐겨 마시며, 선원 내지 빈털터리들이나 먹는 술로 치부되던 다이키리가 1940년대 미국에서 대히트를 치게 된다. 딸기나 바나나 등 과일을 곁들인 다이키리를 비롯해 럼주에 설탕 없이 라임만 넣은 ‘파파 헤밍웨이’, 야생 버찌로 만든 술인 마라스키노를 베이스로 사용한 ‘다이키리 플로리디타’, 얼음을 포함한 모든 재료를 블렌더에 넣고 갈아 스무디처럼 걸쭉한 질감을 만들어내는 ‘프로즌 다이키리’ 등 다양한 종류로 변형, 분화됐다. 최근 칵테일바가 대거 늘어난 덕분에 한국에서도 쉽게 마실 수 있다.

*김남희에게 다이키리는: “모히토가 청새치잡이 배에서 막 내린 근육질 어부라면, 다이키리는 마린 룩을 빼 입고 요트 위에 서있는 도시 남자와 같다.”

① 쿠바의 딸기 다이키리 ② 브라질의 카이피리냐. 게티이미지뱅크③ 따르는 방법이 독특한 스페인 시드라. 유튜브 캡처④ 멕시코의 메스칼을 베이스로 만든 오악사카 올드패션드. 한스미디어 제공⑤ 물을 섞으면 뿌옇게 변하는 그리스의 우조. 게티이미뱅크

● 따라 마시는 재미가 있는 스페인 시드라

스페인 하면 상그리아나 셰리가 먼저 떠오르지만, 시드라(Sidra)만큼 깊은 추억을 선사하는 술도 없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먹을 수 있는 시드라는 주문을 하면 웨이터가 테이블 옆으로 와 서빙쇼를 보여준다. 한 팔을 쭉 뻗어 머리 위로 시드라 병을 든 다음 다른 한 손은 허리 밑에서 잔을 45도 기울여 낙폭이 1미터 이상 되도록 유지한 채 폭포처럼 따라준다. 공기와 많이 접촉하면 할수록 맛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길고 느리게 낙하하며 술잔의 안쪽 면에 부딪힌 시드라가 브이자 모양으로 치솟으며 가벼운 거품을 일으킬 때, 여행객의 입안에선 탄산수 같은 환호가 터진다.

시드라는 우리나라 말로 하면 사이더(Cider), 즉 사과 발효주다. 우리가 먹는 칠성 사이다와는 무관하다. 영어권에서 애플 사이더로 불리는 다양한 형태의 사과 발효주는 15세기까지만 해도 와인을 능가할 만큼 막강한 세력을 떨친 알코올 음료였다. 지금도 유럽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목격할 수 있는 이 시큼하고도 드라이한 저도주는 미각을 돋우는 데 으뜸이어서 가벼운 치즈나 해산물과 먹으면 좋다. 최근 유럽 이외 지역에서 급격히 인기가 상승하고 있는 술이다.

*김남희에게 시드라는: “매사에 냉소적인 유머를 구사하는 사무실 동료처럼 톡 쏘는 시큼한 맛.”

● 물을 부으면 구름빛으로 변하는 그리스 우조

그리스를 대표하는 전통주 우조는 아니스 열매로 담근 증류주다. 원조를 놓고 싸우고 있는 터키의 전통주 라키와 사실상 같은 술. 알코올도수 최저 37.5도에서 최고 50도인 이 향긋한 독주는 역시 아니스를 원료로 하는 압생트의 인기가 시들어갈 무렵인 20세기 초 그 대체재로 인기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스트레이트로 마시기보다는 얼음잔에 언더락으로 마시거나 물에 섞어 먹는다. 신기한 것은 소주처럼 맑은 우조가 물이나 얼음과 섞으면 뿌옇게 구름빛으로 변한다는 점. 아니스의 에센스 오일이 알코올에는 용해되지 않지만, 물에는 녹기 때문이다.

저 어마어마한 알코올 함량으로 인해 천천히 홀짝여야 하는 우조는 향긋하고도 달콤한 풍미 때문에 쉽게 취한다. 설탕이 위에서의 에탄올 흡수를 막아 실제로는 취했음에도 왠지 계속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호연지기가 샘솟는 탓이다. 산토리니의 작은 식당에 앉아 지중해를 바라보며 몇 잔 홀짝였을 뿐인데 어느새 만취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신비. 그래서 우조는 식전주임에도 보통 안주와 함께 먹는다. 스페인에서 타파스라고 부르는 문어, 오징어, 호박튀김, 정어리, 조개요리 등을 담은 작은 접시를 그리스에서는 메제데스라고 하는데, 두세 명이 메제데스를 공유하며 우조를 마시는 게 일반적이다.

*김남희에게 우조는: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고수, 감초, 정향, 박하와 강렬한 아니스의 향기.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히지 않은 조르바라면 피할 수 없다.”

● 상쾌하게 여름을 부수는 브라질 카이피리냐

브라질의 국민 칵테일 카이피리냐는 브라질산 사탕수수로 만든 증류주인 카샤사를 베이스로 하는 칵테일이다. 럼도 사탕수수로 만들기 때문에 한때 ‘브라질 럼’으로 불렸지만, 브라질 정부의 적극적인 로비로 국제법상 브라질산 사탕수수로 만든 럼에만 카샤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 달콤한 스피릿을 즐기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바로 칵테일 카이피리냐를 만들어 먹는 것. 스피릿(도수 20도 이상의 술) 평론가 조엘 해리슨과 닐 리들리가 지난해 펴낸 책 ‘스피릿’(한스미디어 발행)에 따르면, “카이피리냐는 흥행 대박을 터뜨린 달콤하고 호감가는 영화 ‘모히토’의 원전 같은 칵테일”이다. 모히토가 소다수로 희석되고 민트로 향기를 돋운 후 다량의 설탕으로 달콤함을 더하는 것과 달리 카이피리냐는 술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상태로 심플하게 마신다. 라임 조각 몇 개를 으깨 즙을 낸 후 카샤사를 붓고 약간의 설탕시럽에 얼음을 넣어 휘휘 저으면 끝. 후텁지근한 여름날 이토록 상쾌하고 강렬한 맛이라니. 다행스럽게도 최근 몇 년 새 국내 칵테일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남희에게 카이피리냐는: “끈적끈적한 연애에 지친 이들을 위한 리프레쉬 칵테일. 잘게 부순 얼음이 가득한 카이피리냐 한 잔이면 혈관까지 초록빛 라임의 상큼함이 스며들 듯.”

● 데킬라의 과묵한 형제 멕시코 메스칼

멕시코의 상징 테킬라는 잠시 잊고 이제 메스칼을 마실 차례다. 멕시코 원산의 용설란(아가베의 일종) 수액을 발효시켜 만든 이 증류주는 테킬라를 그 하위범주로 포함한다. 스파클링 와인 중 샴페인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만 샴페인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듯, 메스칼 중 테킬라 지역에서 나온 것만 테킬라가 되는 것. 메스칼은 테킬라의 회오리급 인기로 오랜 세월 그늘에 가려져있다가 20여년전 투박한 듯 은은한 스모키 풍미가 재발견되면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멕시코 남부 오악사카 지방의 것을 최상품으로 친다. 함께 병입된 애벌레의 단백질이 밋밋한 독주에 색다른 풍미를 가한다. 메스칼 역시 스트레이트로 마실 때는 소금과 레몬이 필수.

*김남희에게 메스칼은: “테킬라보다 투박하고 박력 넘치는 메스칼. 숨겨놓은 마초 본능을 불러낼지도 모른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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