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승의 편파적 육아일기] 42. 도둑 설거지

복직이 이 아빠의 일상을 크게 바꿔놓았지만 안 바뀐 것도 많다. 그 중 하나가 ‘도둑설거지’다. 아들과 아내가 쓰러져 자고 있는 한밤에, 부엌에만 불을 켠 채, 물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 하는 야밤설거지다. 그릇을 떨어뜨리거나 부딪히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에 평소보다 손에 힘이 배는 더 들어간다.

이 설거지를 하다 보면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아들놈이 좋아하는 애호박이 오늘 메뉴로 나왔구만’, ‘그런데 왜 이렇게 남겼지?’, ‘어라, 밥도 남겼네?’ , ‘애 엄만 밥 먹을 힘도 없다더니 진짜 저녁을 안 먹었나…, 그릇이 안 보이네….’ 대략 이런 식이다.

여기에다 식사 때 동원된 숟가락과 포크 개수, 벗어놓은 아들 옷 상태로 미루어 아들이 식사에 임한 태도도 대충 짐작해볼 수 있다. 자고 있는 아들이, 아내가 이 아빠한테 해주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설거지에 있는 셈이다. 저녁에 술을 많이 마신 경우 이튿날 아침으로 미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야밤 설거지는 이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일종의 의식으로 자릴 잡았다.

복직을 해서도 이 아빠의 하루는 도둑설거지로 마무리 된다. 설거지를 마친 뒤 깨끗해진 부엌을 보고 있으면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어디 이 뿐인가. 똥 기저귀로 가득 찬 종량제 쓰레기 봉투, 음식 쓰레기 봉투를 내다 버리고, 아들 저녁 먹이는 동안 아내가 돌린 세탁기의 빨래 널기, 집안 이곳 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장난감과 책 정리하는 것도 이 아빠 몫이다. 복직 전에는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놓은 뒤 라디오 틀어놓고 하던 일들이지만, 이젠 아들과 아내가 잠든 사이 ‘소리 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이 됐다.

이 아빠가 야밤 설거지를 비롯, 퇴근해 집에서 하는 이 일들을 열거하면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네가 그렇게 착한 사람이더냐?’, ‘아무리 봐도 구라 같다’ , ‘직접 안 봤으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하는 사람부터 ‘완전히 잡혀 사는구만, 잡혀 살아’, ‘대한민국 남자 평균치, 이놈이 다 깎아먹네…’ 하면서 화를 내는 사람까지 있다.

이런 반응들을 접하면 이 아빠는 해명 수준의 설명을 내놓는다.

“아내는 일찍 퇴근하기 위해 이 아빠보다 더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는데, 오후 4, 5시에 아들을 어린이집에서 찾는다. 새벽 출근으로 피로가 누적됐을 아내는 집에 와서 좀 쉬는 게 마땅하지만 퇴근과 동시에 아들을 봐야 하니 그럴 수가 없다. 이런 사람한테 집안일까지 떠넘기면 당장 ‘누구 누구 남편은 청소하는 아줌마, 반찬하는 아줌마 쓰라고 생활비를 얼마씩 준다더라’는 식의 아내 친구 남편 이야기가 나오기 십상이다. 그러니 전날 밤 퇴근해서 웬만한 집안일은 해놓는, 이 선제적인 조치는 여러모로 유익하다.”

이쯤에서 절반 정도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 아빠는 여세를 몰아 쏟아낸다.

“애 엄마가 어린이집에서 찾아온 아들은 2, 3시간의 낮잠과 달콤한 오후 간식으로 ‘완전 충전’ 된 상태인데, 새벽부터 일어나 일을 하던 애 엄마랑 게임이 안 된다. 그래서 아내는 밤 9~10시쯤 기절하다시피 아들과 함께 잠에 든다.(어떤 때는 아들보다 더 빨리.) 아들놈을 상대로 놀아주고 씻기고 먹인 다음 또 씻기고 놀아주는, 이 장렬한 전쟁을 치르느라 아수라장이 된 집안 뒷정리는 이 아빠가 좀 해줘야 아내도 다음날 무리 없이 출근하지 않겠어??”

아들의 성장하면서 아들 소유의 물건들도 점점 늘고 있다. 그 만큼 청소, 집안 정리정돈에도 많은 손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 정도 설명하면 나머지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마누라 돈 벌어오게 하는 고도의 수작이로구나’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야밤 설거지의 궁극적 수혜자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 대부분 이 아빠편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내가 돌아서기 시작했다. 아내는 언제부턴가 이 아빠의 육아일기에 대한 피드백도 중단했다. 내용이 너무 편파적이라는 거다. 읽다 보면 자신이 한번씩 등장하는데 그럴 때마다 근시안적인 엄마로, 계산적인 아내로 매도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나쁜 여자로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다. 오늘 이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이걸 쓴다고 하자, 아내는 “당신 참 해도 해도 너무 한다”며 항의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는 집에서 노는 걸로 알겠네, 노는 걸로 알겠어!”

아내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아빠가 이렇게 써내려 온 데에는 지난 1년 동안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다. 맞벌이를 한다면 이 정도의 집안 일은 기본이라는 것이다. 맞벌이라면 집안 일이 ‘같이 해야 할 일’이지, 어느 한쪽이 ‘돕는다는 생각으로 할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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