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연평해전’이란 영화가 화제가 되고, 그리스 국민이 채권단의 가혹한 궁핍 요구를 거부한 걸 보면서 13년 전 하이닉스반도체 매각 논란이 떠올랐다.

연평해전 때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고 비판 받는 김대중 정부는 당시 하이닉스를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매각할 작정이었다. 값도 헐값(40억달러ㆍ현재 시가총액 280억달러)이었다. 게다가 15억달러를 마이크론에 저리로 빌려줄 예정이었다. ‘하이닉스를 이런 조건으로 도와주면, 독자 생존할 수 있다’는 반론이 나왔으나 막무가내였다.

대통령의 의지를 받든 당시 재정경제부가 ‘매각 불가피론’을 주도했다. 하이닉스를 미국 경쟁업체에 넘기는 방안은 미국 컨설팅 업체의 제안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반발이 일었다. 신국환 산업자원부 장관이었다. 그는 상공관료 출신으로 자유민주연합을 통해 중간에 정치에 입문한 정치인이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김종필ㆍ박태준 도움으로 출범한 이른바 ‘DJP 연합’ 덕분에 산자부 장관에 입성했다. 하이닉스 구조조정특위 위원장도 맡았던 그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기반이 무너질 것’이라고 극력 반대하며, 재경부에 맞섰다.

돌이켜보면 당시 양측 입장은 반도체 업황에 대한 완전히 다른 전망을 전제로 했던 만큼 매각 불가피론이나 반대론 모두 100% 상대방을 제압할 수 없었다. 또 양측 모두 나름대로 ‘국가 경제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했을 것이지만, 13년 세월은 산자부 손을 들어줬다. 하이닉스는 기신기신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더니 2011년 SK그룹에 팔리면서 채권단에게 1조원 대박을 터뜨려 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얻은 이익의 태반은 외환은행에 집중됐고 이 가운데 상당부분은 미국 론스타 수중으로 넘어갔다.

하이닉스 매각논란과 이후 극적인 반전을 지켜보면서 기자의 세상 보는 눈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2002년 공교롭게 재경부와 산자부를 겹쳐 취재했던 기자의 기억에 따르면 재경부 논리는 정교했다. 당시에는 ‘미래를 꿰뚫는 혜안’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던 미국 컨설팅업체 도움 때문인지, 업황별 예상 손익과 부채비율 수치 등을 제시했다. 반면 산자부 논리는 다분히 감성적이었고 애국심에 호소하는 경향이 강했다.

2002년과는 다르지만 미국식 ‘주주 우선주의’사고와 한국식 경영이 또다시 맞붙고 있다. 바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논란이다. 이번에도 미국 논리가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어 보인다. 삼성물산 주가가 최근 몇 년간 바닥을 쳤던 것이나, 자사주를 잔뜩 사놓았다가 결과적으로 시세보다 싼 값에 넘기는 건 소액주주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일 수 있다. 미국 언론 논조가 부정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논란 속에 삼성과 엘리엇 매니지먼트 사이의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을 무조건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삼성그룹이라는 전일체(全一體)의 한 부문으로 기능해 왔다는 점에서, 또 하이닉스 사례에 비춰 봤을 때 그럴듯한 주장이 장기적으로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국민연금이 삼성의 기존 체제를 흔드는 선택하지 않은 것은 현명한 판단이라 생각한다.

글자 그대로 국민의 돈이 모인 ‘국민연금’도움으로 합병이 성사된다면, 삼성이라는 기업집단의 정체성은 바뀔 수 밖에 없다. 합병 기업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통로이겠지만, 국민기업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글로벌 플레이어’가 된 뒤부터 삼성 주변에서는 이병철 창업주의 ‘사업보국’사훈이 퇴색됐다는 지적이 많았다. 기회와 위협요소가 난마처럼 얽힌 한국 경제에서 새로운 삼성이 ‘효율성’ 못지 않게 ‘지속가능성’을 지향점으로 삼길 기대해본다.

조철환ㆍ워싱턴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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