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 유서대필 무죄 확정

"유서와 필적 동일하다는 근거,

항상성 있는 특징으로 볼 수 없어"

김기설 유서 누가 썼는지 판단 유보

대필사건은 미스터리로 남아

고 김기설씨의 유서(왼쪽)와 강기훈씨가 써보인 필적.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법원이 14일 강기훈(51)씨의 유서대필 혐의(자살방조)에 대해 무죄를 확정하며 1991년 필적감정의 허점을 지적한 지난해 서울고법의 판단을 그대로 인정했다. 그러나 당시 필적 감정이 고의 왜곡된 정황이 짙은데도, 조작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투신해 숨진 김기설씨의 유서가 김씨가 직접 쓴 것인지, 강씨 이외 제3자가 작성했을 개연성이 있는지도 판단하지 않았다. 법률적으로 강씨의 무관함은 인정하면서, 김기설씨 유서 대필사건은 미스터리로 남겨놓은 셈이다.

대법원은 이날 강씨의 무죄를 확정하면서 그 근거로 강씨의 필적과 유서 필적이 동일하다고 판단한 19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소속 감정인 김형영씨가 작성한 감정서를 믿기 어렵다는 점을 들었다. 재판부는 “국과수 감정인이 유서의 필적과 강씨의 필적이 동일하다고 판단한 근거로 내세운 특징들 중 일부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항상성이 있는 특징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감정인이 유서의 ‘보’자를 ‘오’자로 잘못 판독한 것을 대표적 사례로 거론한 뒤, 오히려 이는 강씨의 필적이 유서 필적과 다르다고 볼 유력한 자료라고 본 서울고법의 지적도 타당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사건 당시 필적 감정인이 “강씨의 ‘ㅎ’필법이 최근에 변형됐다”고 단정, 이를 판단의 중요한 요소인 ‘희소성’있는 필적의 특징에서 제외시킨 것도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유서에선 ‘ㅎ’자의 첫 획이 그어진 방향이 일정하지 않지만, 유서 작성 전인 1990년 작성된 강씨의 수첩에선 ‘ㅎ’자의 첫 획이 그어진 방향이 모두 동일한 점을 주목한 것이다. 유서의 ‘ㅆ’자(‘있으리라’, ‘못했지요’ 등)에는 두 번째 획이 생략된 특징이 있는데 강씨의 수첩 등에는 또렷하게 쓰여 있다는 점도 강씨가 대필하지 않은 근거로 제시됐다.

아울러 대법원은 필적 감정인이 1991년 5월과 7월 두 차례 낸 감정서에서 강씨가 단국대 화학과 재학 시절 쓴 화학노트 필적도 유서의 필적과 동일하다고 한 것도 신뢰하지 않았다. 감정인이 2007년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당시 “화학노트의 경우 유서와 동일 필적의 특징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웠고, 유서와 단순하게 비교하면 상이한 점이 많았다”며 번복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또 감정인이 혼자 필적 감정을 했으면서 국과수 소속 감정인 4명이 공동으로 유서를 심의한 것처럼 법정에서 위증한 것도 감정 결과를 믿기 어려운 근거로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강씨가 유서를 대신 써 김기설씨의 자살을 방조했다는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한 원심 판단은 정당하다”며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원심(서울고법)과 마찬가지로 감정 조작 여부나 유서 작성자를 판단하지 않은 채 사건을 마무리했다. 앞서 서울고법은 “강씨와 김기설씨 필적 감정결과와 유서 내용 등을 종합할 때, 이 사건 유서는 김씨가 직접 작성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고만 언급했다.

강씨가 24년 만에 누명을 벗게 된 데는 김기설씨의 친구가 2005년 경찰청 과거사위원회에 낸 김씨의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이 결정적이었다. 이를 토대로 2007년 국과수는 1991년 사건 때와 다른 결과를 내놓았고 이는 법정에서 강씨의 무죄로 연결됐다.

손현성기자 hs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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