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70년을 맞아 역사적 사건으로 명명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미국 방문은 전세계 많은 이들의 기대를 져버린 채 끝났다. 전범국가 일본 총리에게 주어진 사상 첫 미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진정성 있는 과거사 사과나 식민지배 및 침략을 인정하는 책임 있는 자세는 볼 수 없었다. 아베 총리가 생각하는 과거사 참회는 미국을 향한 것뿐이었다. 그는 워싱턴시 내셔널몰의 2차 세계대전 ‘자유의 벽’에 다녀온 뒤 “젊은 미국인들의 잃어버린 꿈과 미래를 생각했다”며 “만약 숨지지 않았다면 행복하게 살았을 젊은 미국인들의 가족을 위한 사랑을 발견했다”고 말했을 뿐 그 이전 식민지배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당장은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합의대로 자위대의 활동무대를 전세계로 넓혀 ‘보통국가’ 지위를 순조롭게 얻어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A급전범 용의자의 손자, 아베가 추구하는 군사적 패권의 부활은 가능한 꿈인가.

헛된 꿈이 될 것이란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우선 일본 내부 사정이 그렇다. ‘군사력이 강한 일본’을 현실이 감당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끊이지 않는다. 지금도 방위예산이 5조 엔인 상황에서 자위대의 해외활동 강화는 막대한 예산증폭을 수반한다. 일본 언론은 “재정건전화에 반해 사회보장비 삭감을 진행하면서 국방비 대폭확대가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냐”“일본의 힘에 어울리느냐”고 묻고 있다. 일본이 천문학적 재정부채에 시달리는 나라임은 국제적 상식이다. 지난주 신용평가사 피치는 일본 국가 신용등급을 강등했다. 전쟁에 대해 원초적 공포감이 극심한 일본인들은 당장 이슬람국가(IS) 같은 과격 테러단체에게 일본인이 타깃이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성공여부가 불투명한 아베노믹스, 심각한 인구감소와 초고령화 등 산적한 일본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외면하고 1930, 40년대 제국주의 일본의 부활을 아베가 생각한다면 그건 과대망상으로 보인다. 군국주의를 추구할만한 내적 동력이나 에너지가 부재하다. 도쿄 한복판 지요다(千代田)구에서 기자가 목도하는 일본 젊은 세대들은 과거보다 왜소해진 일본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실속 있는 삶을 추구하려는 모습이 다분하다.

우리가 주목하고 응원해야 할 대상은 일본의 양심세력, 아직 힘에 부치는 야당, 지식인 그룹들이다. 일본의 바람직한 정당정치, 일본 민주주의가 아베의 폭주를 저지할 해답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영구평화론’을 떠올린다. 민주주의 국가끼리는 서로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는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민주국가의 정치지도자는 자의적이고, 일방적으로 전쟁을 선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미 의회 연설에서 스스로 손발을 묶었다. 그는 “미국은 19세기 후반의 일본을 민주주의에 눈뜨게 만들었다. 일본에게 미국과의 만남은 민주주의와의 조우였다”면서 미국과 함께 자유, 민주주의, 법의지배를 세계에 확산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바로 그 성숙한 일본의 민주주의만이 균형감 잃은 아베를 막는 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주 일본국회에선 안보관련 법제를 ‘전쟁법안’으로 표현했다 여당으로부터 강력한 수정압박을 받았던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穗) 사민당 의원이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아 그 발언을 속기록에 남겼다.

오는 7일엔 집권 자민당 내 우경화를 반대하는 비둘기파 소장의원 모임이 결성된다. 이들은 ‘역사수정주의적 과잉 내셔널리즘을 배제하고 보수의 왕도(王道)를 걷겠다’는 설립취지서를 내걸었다. 이런 싸움들이 일본 국회를 갈수록 치열하게 달구길 기대한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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