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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원근법] 분노 유발하는 사회

입력
2015.03.0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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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전달하기 쉽지 않지만 제대로 실감하는 말의 하나가 ‘욱하다’라는 단어다. 외국어에도 ‘욱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들이 있다. 하지만 ‘욱하다’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유독 와 닿는 것은 특유의 공동체주의적 문화와 관련이 있다. 가족이나 회사와 같은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느끼는 불편한 마음이 주변인들은 잘 모르게 축적되다가 일순간 폭발하는 경우를 드물지 않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욱하다’는 앞뒤를 헤아림 없이 분노가 불끈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분노가 갑자기 폭발한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과거에도 분노가 유발하는 사건들이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근 관찰되는 사건은 과거보다 황당하고 잔인하며 피해 규모 또한 크다. 분노가 유발하는 사건들의 빈번한 발생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불안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사회통합이 약화돼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주목할 것은 우리 사회에서 분노의 조절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분노 조절 장애란 분명한 동기 없이 스스로 분노를 참지 못해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행위가 되풀이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건강보호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분노 조절 장애 환자는 최근 증가해 왔다. 2009년에 분노 조절 장애 환자는 3,720명이었지만 2013년에는 4,934명으로 늘어났다. 이 숫자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사람들인 만큼 분노 조절 장애 환자의 실제 규모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사회학 연구자로서 관심을 갖는 것은 분노 조절 장애의 원인이다. 분노 조절 장애를 가져오는 일차적인 원인으로는 유전적 특성을 포함한 정신병리적 요인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 못지않게 주목할 것은 분노를 증가시키는 사회적 환경이다. 이 사회적 환경은 다시 개인적 차원과 구조적 차원으로 나눠진다.

개인적 차원에서 분노를 유발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불공정에 대한 인식에 있다. 자신이 정당하게 대우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억울한 느낌과 생각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나 조직에 대한 불만을 낳고, 이 불만이 쌓이면 결국 분노로 폭발한다. 이때 분노의 대상은 가까운 지인들이 될 수도 있고, 불특정 다수가 될 수도 있다. 주목할 것은 분노의 원인을 정의롭지 못한 불공정한 현실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분노 폭발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을 크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경쟁지상주의와 경제적 양극화에 있다. 어릴 적부터 능력에 따라 줄을 세우는 경쟁사회의 구조와 문화는 결국 다수를 좌절시킬 수밖에 없고, 이 좌절은 타자에 대한 공격적 분노를 유발한다. 경제적 양극화의 경우에는 특히 갈수록 견고해지는 부의 세습이 상대적 박탈감을 증대시킨다. 이 박탈감은 사회에 대한 증오를 가져오고, 이 증오는 주변인에 대한 잔인한 범죄로 나타날 수 있다. 요컨대, 경쟁지상주의와 경제적 양극화는 우리 사회를 소수의 ‘위너’와 다수의 ‘루저’, 또는 소수의 ‘엘리트’와 다수의 ‘잉여세력’으로 분단화함으로써 좌절과 박탈감을 심화시키고 분노를 강화시킨다.

충동적 분노를 폭발시키는 이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분노가 모두 범죄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갈수록 분노 유발 사회로 변화해 가는 것은 적잖이 우려스럽다. 무엇보다 분노 폭발의 주요 대상이 어린이, 여성,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인 경우가 많은 현실을 고려할 때 분노 조절은 이제 개인적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 의제가 돼야 한다. 분노를 적절히 예방하고 제어하기 위해서는 상담과 치료 등의 개인적 처방에서부터 공정하고 협력적인 사회 시스템 구축 등의 사회적 처방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대응책을 강구해야 한다.

오래 전 발표된 현진건의 소설 가운데 ‘술 권하는 사회’가 있었다. 술 권하는 사회란 말에는 그래도 그 나름의 낭만이 느껴진다. 그러나 분노를 유발하는, 적지 않은 이들을 빈번히 욱하게 하는 사회는 무섭고 살벌한 사회다. 분노 조절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한 이유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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