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수년을 살았지만, 올 겨울은 유독 추웠던 것 같다.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겨울 몇 달을 통틀어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는 도쿄에서 추위를 운운하는 것이 엄살로 밖에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기에는 냉각된 한일관계로 인한 심리적 요인이 더해져 있으니 단순히 엄살만은 아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이 만물의 이치듯, 도쿄 인근 이즈(伊豆) 반도의 가와즈(川津)에는 최근 벚꽃이 만개, 주말 상춘객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때맞춰 경색된 한일관계도 서서히 해빙모드로 진입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각종 지표가 나오고 있다.

우선 지난해까지 일본 출판업계와 서점가를 뒤덮었던 혐한 서적들이 최근 크게 줄었다. 한동안 박근혜 대통령 때리기에 혈안이 됐던 우익 성향의 주간지들도 한국 관련 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더 이상 양국관계가 악화해서는 안 된다는 일본사회의 인식 전환이 자리잡고 있다.

한때 일부 언론이 일본 TV에서 한국 드라마가 사라진 것을 두고 일본 내 한류의 종말로 분석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조금은 과장된 면이 있다. 일본 내 주요 방송은 전성기에 비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한때 한류 방송을 주도했던 NHK가 한국 드라마 방송을 중단,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인기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을 방영하기도 했다.

일본 국토교통성에 따르면 1월 한달간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34만명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을 방문하는 특정 국가 외국인이 한달 만에 30만명은 넘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역시 한일관계 경색이 양국간 교류를 막을 만큼 심각하지는 않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자민당 내 친한파 의원으로 분류되는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총무회장이 지난달 1,400여명의 대규모 민간인 방문단을 이끌고 방한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방문객 대다수가 여행업 종사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향후 양국 왕래의 물꼬를 트기 위한 이들의 역할이 더욱 기대된다.

양국 관계 청신호를 알리는 지표가 서서히 나타나면서 한일 정상회담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는 여론도 형성되고 있다. 한국 갤럽이 최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한일정상회담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에 57%가 그렇다고 응답, 그렇지 않다 34%를 크게 웃돌았다. 정상회담의 필요성에 공감대가 넓게 형성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달 하순 서울에서 열릴 것으로 알려진 한중일 외교장관회담이 한중일 정상회담, 나아가 한일 정상회담으로 연결될 지도 관심거리다.

박 대통령의 비서실장에 이병기 전 국정원장을 기용한 것을 두고 일본 내 분위기도 긍정적이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이 실장이 2013년 6월부터 1년 여간 주일대사를 지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일본을 잘 알고, 현실적인 대응이 가능한 사람”으로 평가했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은 “박 대통령을 가까운 자리에서 보좌할 수 있게 돼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 실현을 위한 역할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기대했다.

한일 정상회담이 성사되기에는 여전히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장애물도 적지 않다. 아베 총리가 전후 70주년을 맞아 발표예정인 아베 담화의 내용에 과거사 반성 수위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고, 한국 정부가 한일 정상회담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정부의 성의 있는 답변이 어느 선에 이를 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장벽을 잘 허물고 정상회담이라는 결실을 얻어내는 것이야 말로, 신임 비서실장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싶다.

한창만 도쿄특파원 cmhan@hk.co.kr

인기 기사

api_db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