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가에서는 ‘정치’라는 직업을 대물림 받은 아베 신조 총리의 행보를 선조의 벽을 넘어 그들이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쟁취하려는 도전과 극복의 행보로 곧잘 비유한다.

아베 총리의 집안은 일본 정가에서도 거물급 정치인을 다수 배출한 명문가로 정평이 나있다.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장관을 지내며 군부파시즘을 지지한 혐의로, 패전직후 A급 전범으로 낙인 찍혔으나 재기에 성공, 총리직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기시 전 총리의 친동생이자, 아베 총리의 작은 외할아버지인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는 일본 헌정 사상 최장기(2798일) 집권한 기록을 갖고 있다.

아베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신문사 정치부 기자를 지내다 기시 전 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케이스다. 그는 이란ㆍ이라크전쟁을 막후 조정하고, 구 소련과의 관계 회복에 나서는 등 빼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는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2차례나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고배를 마시며 총리의 문턱에서 좌절되는 아픔을 겪었다.

일부 정치 평론가들은 아베 총리의 1차 내각(2006년9월~2007년9월)을 정치인이 아닌 인간 아베가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일궈냈다는 데 의미를 둔다. 아버지의 통한의 소원이었던 총리직에 오르기는 했지만, 총리로서 어떤 정치를 펼쳐야 할 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측근 인사들의 잇따른 비리 의혹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골수 보수 우익 유전자를 숨기지 못한 채 사사건건 야당과 대립, 자신의 정치 생명 단축은 물론 자민당까지 위기로 몰고 갔다. 개인의 야망에 사로잡혀 준비되지 않은 정치판에 뛰어든 부작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52세 최연소 총리라는 짊어지기에 버거운 시련이 지속되자 그는 1년 남짓 만에 돌연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총리직을 내팽개쳤는데, 이런 배경에는 “아버지의 소원을 이룬 이상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심리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2012년 총선에서 자민당 압승을 이끌며 재기에 성공한 아베 총리는 제2차 내각(2012년12월~2013년12월)의 항해 목적지를 외할아버지 기시의 꿈인 ‘개헌’에 맞췄다. 기시 전 총리는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손을 거쳐 완성된 현행 일본 헌법을 늘 못마땅해했고, 특히 전쟁과 전력보유를 포기한 헌법9조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인물이다. 기시는 1955년 자민당 결성을 주도했고, 총리가 된 이후에도 줄곧 개헌을 최고의 목표로 내세웠다.

아베 총리는 정치인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늘 기시 전 총리를 꼽는다. 때문에 아베 총리로서는 기시의 꿈인 개헌을 이루는 것은 단순히 조상의 한풀이에서 나아가 정치적 스승을 뛰어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일각에서는 아베 총리가 개헌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것을 두고 “외할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로망을 달성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6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자민당이 이뤄내지 못한 개헌을 단시일내에 이뤄내기란 아베 총리로서도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는 집권초기 헌법9조 개헌에 앞서 헌법96조 개헌을 운운하다가, 이마저 여의치 않자 이달 7월 집단적 자위권 용인을 둘러싼 헌법해석변경을 각의결정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헌법9조에 손을 댔다. 아베 총리는 각의결정 이후 “외할아버지의 소원을 드디어 이뤘다”는 축하 메시지를 자주 받았는데, 이 말에 매우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헌법9조를 그냥 둔 채 집단적 자위권 해석을 바꾼 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은 아베 총리는 장기 집권 구도를 조성, 시간을 두고 제대로 헌법을 고쳐보겠다고 나선 것이 최근 단행한 국회해산과 총선이다. 27일 집권 3년차에 돌입한 아베 총리는 내년 9월 자민당 총재선거를 무투표, 추대형식으로 재선에 성공한 뒤, 당령 개정을 통해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총리를 지속하겠다는 시나리오를 세우고 있다.

문제는 할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한 이후의 일본사회의 모습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아베 총리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제1차 내각 당시 총리가 된 이후의 성찰이 빠졌던 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아베 총리의 개헌정국을 우려하는 일본 국내는 물론 주변국가의 불안감이 가중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한창만 도쿄특파원 cmhan@hk.co.kr

인기 기사

api_db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최신기사